작성일 : 12-01-07 15:33
   <부동산투기바람에 날린 아파트>에서 <‘데모하기 전에는 미장원에 다녀오세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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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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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투기 바람에 날린 아파트


생각해보면 경실련이라는 운동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 독특한 운동이다.

경실련을 만든 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해외에 경실련과 비슷한 운동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하지만 나는 해외에서 경실련과 같은 운동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미국에서 6년 동안 지냈다고는 하지만, 그곳의 시민운동을 눈여겨 볼 기회조차 별로 없었다.

미국에 있을 때 나의 모든 관심은 어떻게 하면 전두환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민주화가 실현된 뒤 사회운동을 어떻게 재편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여유가 없었다.

때문에 미국에 많은 시민단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6년 동안 한번도 시민단체를 방문한 적이 없었다. 굳이 들자면 한국대사관에서 시위를 할 때 ‘미국의 집회 및 시위법’에 따라 ‘시민불복종운동’을 한번 경험해본 것이 유일한 경험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경실련운동은 그 틀이나 모양새에서부터 전적으로 한국의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경제정의실현을 가장 중요한 운동목표로 삼았던 것도 전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이나 공공의 정의를 위한 운동은 간혹 있었어도 경제정의에 촛점을 맞추어 운동을 전개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우리나라에서만 경제정의를 위한 시민운동이 등장하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경실련 발족 당시인 1989년의 상황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1989년 봄,여름은 땅값,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많은 집없는 사람들의 주름살을 더욱 깊게 만들었던 때이다. 그 당시 땅가진 사람의 5%가 전국 민유지의 65.2%를 갖고 있었을 정도로 땅이 몇몇 사람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던 형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땅값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의 양이 너무나도 엄청나서 88년에는 땅가진 사람이 한 해동안 약 2백12조원을 벌었고, 89년도에는 약 3백14조원, 90년도에는 약 2백67조원을 벌었다.

말하자면 세 해만에 8백여조원에 달하는 돈을 땅가진 사람들이 번 셈이다. 그돈이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닌 만큼 결국 그 돈은 ‘땅을 갖지 않은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땅 가진 사람’의 호주머니로 합법적으로 이전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엄청난 돈의 대이동에서 나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나는 89년 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성내동의 32평 아파트를 팔고 다른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다가 아파트 값이 갑자기 뛰는 바람에 졸지에 아파트 한채를 완전히 날려 버린 경험이 있다.

나는 80년경 기독교회관 주택협동조합에 들어서 성내동 아파트를 장만해 미국에 있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돌아와서 보니 아파트가 낡고 도심과 너무 멀어 불편해 등촌동 쯤에 새 아파트를 장만할 생각으로 성내동 아파트를 팔아 버린 것이다.

성내동 아파트를 팔고 나서 아파트 분양 신청을 했는데 그 뒤 갑자기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하더니 얼마 뒤에는 아파트를 판 돈만으로는 새 아파트를 사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결과적으로 아파트 한채를 완전히 날려버린 셈이다. 아마 그 당시 돈으로도 거의 1억원에서 2억원 가량은 손해를 본 것같다. 졸지에 무주택자가 된 나는 그 뒤부터 최근까지 부모님이 계시는 아파트에 얹혀서 지내다가 얼마 전 목동아파트를 전세내서 살고 있다.

내가 이렇게 졸지에 아파트를 날리고 1억원 내지 2억원을 손해본 반면 아버지는 내가 귀국하기 직전인 87년말 경에 문화촌 단독 가옥을 팔고 대치동 국제아파트로 옮겨 불과 3년만에 생각지도 않았던 4억원이 넘는 큰 돈을 버셨다.

아버지께서는 88평 짜리 문화촌 집을 1억원이 채 못되는 돈을 받고 팔아서 1천만원을 보태어 국제아파트로 이사를 갔는데, 3년만에 아파트값이 껑충 뛰어 올라 그 아파트 가격이 89년엔 5억4천만원까지 나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집에 가만히 앉아 계시면서 한달에 평균 1천만원씩 돈을 번 셈이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아버지는 너무 탐욕적이어서 내돈 2억원을 갈취하고도 성이 안차서 남의 돈 2억원을 더 갈취했다” 고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어쩔줄 몰라 하시며 “나는 예나 지금이나 집 한 채밖에 없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도대체 1억이건 5억이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시곤 했다.

순간적인 실수로 집을 잃어버리는 아픔은 내 개인적으로도 참 고통스러워서 요즘도 아파트단지 주변을 지나칠 때면 기분이 좋지 않고, 솔직히 아파트단지 근처로는 별로 가고 싶지도 않은 그런 억울한 심경을 갖고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하나님께서 나한테 집없는 서민들의 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런 실수를 하게 하셨을 것이다”고 위안을 삼곤 했는데,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앞으로 집없는 서민들의 아픔을 잊지 않아야 겠다”는 다짐이 생기곤 했다.

이처럼 부자기간인 아버지와 내 경우만 봐도 불과 한 두해만에 한 사람은 많은 돈을 잃고 무주택자가 되었고 한 사람은 많은 돈을 벌었으니 나라 전체로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늘을 모르고 뛰는 부동산 값에 울고 웃었을 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자기 땅이나 집 없이 전월세에서 사는 사람들 가운데는 땅값 상승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땅값 상승은 곧 바로 전세,월세 값의 폭등을 낳아 집없는 사람들의 설움을 더욱 깊게 만든다. 또 시중 물가를 껑충 뛰게 만들어 어렵게 월급을 올려봐야 실제 살림살이는 펴지지 않는 악순환을 낳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1989년엔 노동자들의 노사분규가 크게 일어나 그해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이 적지 않았다. 약 20% 정도의 임금인상이 이루어져 전체 임금인상분을 계산하면 약 10조원에 달했다. 그런데 같은 해 땅가진 사람이 번 돈은 3백14조에 달했으니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땅부자와 거리가 먼 서민들인 것을 감안하면 노동자들은 열심히 투쟁해서 10조원을 벌고 뒤편으로 3백14조원을 밑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런 현실이다 보니 서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해마다 전세값이 뛰어 지하실로 도시변두리로 산꼭대기로 전전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임금이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땅값상승분을 쫓아가지 못해 구체적인 생활형편은 훨씬 더 열악해졌다.

반면 투기꾼들의 주머니는 갈수록 두툼해졌다.

실제로 그 당시 ‘나는 아파트를 옮겨서 몇억원을 벌었고, 어디 아무개는 땅 을 전매해서 몇억을 벌었다더라’는 말이 예사로 들려 왔고, ‘아파트를 사서 다시 전세를 주고 그 돈을 빼서 또 딴 아파트를 사서 돈을 굴리고 또 굴려 떼돈을 벌었다’는 사람도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 당시 이러한 상황이 뿌리뽑히지 않고서는 우리사회의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바로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한 시민운동이었고, 이것이 경제정의실현시민연합으로 구체화되었다.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돈이 생산적인 방향, 투자의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만약 그 반대로 돈이 투기에 몰린다면 그 나라의 경제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려 하지 않고 서비스업종에 몰려 향락퇴폐산업만 번창하도록 만들고, 중소기업인들이 열심히 공장을 짓고 제조업에 종사하려고 하지 않고 강남에 가서 여관업만 하려고 한다면 그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전세값 상승분조차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면 노동자들은 일할 맛을 잃어 버릴 수밖에 없다. 고달프게 일해서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아보았자 땅투기해서 벌어들이는 불로소득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코끼리 앞에 비스켓’인 셈이니 이런 상황에서는 근면성실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소위 ‘실망소비’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집 하나 장만하기 힘들다’는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자동차부터 사고보자느니 불고기 먹고 외식하며 우선 즐기고 보자느니 하는 풍조가 만연해 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1989년 7월의 상황은 바로 이러한 망국적인 분위기가 전 사회를 휩쓸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나는 이런 우리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 당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폐였던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고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작업이 그 시대 그 상황 속에서 가장 필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노력하면 틀림없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세제개혁이건 아니면 경제개혁 조치이건 간에 땅투기를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우리사회에 만연한 투기바람을 잠재워야만 비로소 경제성장도 이룰 수 있고, 사회적 형평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던 재야운동이 바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올바르게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재야운동은 이런 문제에는 사실상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당시 재야운동은 소위 통일운동세력과 노동운동세력으로 갈라져서 일반인들의 삶과는 별반 상관없는 노선투쟁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소위 피디(PD)계열인 민중민주주의혁명운동세력은 어떻게 하면 노동해방을 실현할 것이냐에 관심을 집중해 해마다 과격한 노사분규를 일으키는 데 힘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로 엔엘(NL)계열인 민족민주주의 혁명운동세력은 통일운동에 관심이 집중되어 평양축전참가투쟁이라든가 북한바로알기운동, 문익환목사님방북사건 등 통일투쟁에만 관심을 쏟았다.

때문에 나는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우리사회를 좀먹고 있는 부동산투기의 문제를 근절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결국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운동권에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제까지 손을 놓고 뒤에서 구경만 했던 사람들이 운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돈이 많아 땅투기를 하고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자금력을 토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막강한 로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한뼘 자기 땅도 없이 부동산 가격 폭등 때문에 이집 저집 쫒겨 다녀야 하는 서민들은 로비를 펼만한 힘도 없고 조직화되어 있지도 못해 피해만 입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이처럼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피해만 입었던 보통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운동이 나오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나는 이 새로운 운동은 노동자나 자본가 등 특정 계급의 사람들만의 운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우리사회는 땅값상승이 너무 심각해 사람들을 굳이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자면 하나는 ‘집있는 계급’, 또 하나는 ‘집이 없는 계급’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집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재산증식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대개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이라고 하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모순’을 지칭한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사회의 상황은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모순보다 부동산투기로 인한 불로소득계층의 문제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우리사회의 더 큰 모순은 생산자계층과 불로소득계층간의 모순이었고, 이 생산자계층에는 노동자 뿐만 아니라 자본가도 포함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자본가에도 생산적인 자본가와 땅투기나 일삼는 기생적인 자본가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으므로 ‘모든 자본가를 무조건 적으로 돌리는 운동’과 같은 사회운동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경실련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운동이다.

우리는 경실련 발기선언문에서 ‘경실련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에 기초하되 다만 시장경제가 가져다주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정부가 개입해서 시정하는 것을 통해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 이 두가지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 말은 그 당시 우리나라 사회운동이 명시적으로 밝혔건 혹은 암묵적으로 상정했건 간에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것과 명백하게 다른 점이다. 말하자면 경실련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기초한다’라는 점을 당당하게 밝히고 시작한, 어떤 의미로는 최초의 대표적인 운동단체라고 볼 수 있다.



경실련을 만든 사람들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굳힌 나는 ‘부동산 투기와 싸우는 시민운동’이라는 한 페이지 짜리 제안문을 써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함께 이 운동을 하자고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기독교운동 내에서 아이덴터티그룹으로 불리던 후배들과 가까왔는데, 대개 새문안교회 출신들이었다. 신대균, 김성수, 이덕승, 유종성, 장신규, 전응휘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사회과학적 인식에 기초해 사회운동을 강조하던 그룹에 비해 기독교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내가 기사연에서 실무자들의 스트라이크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함께 분개하기도 하고 나를 도와주기도 했던 후배들이다.

나는 우선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신대균(목사)에게 제안문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신목사가 ‘형님, 참 좋은 운동인 것같습니다. 함께 이 운동을 해봅시다’며 선뜻 동의해 주었고, 다른 후배들도 대부분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후배들과 함께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운동을 펴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와 싸우는 시민운동’이 아니라 좀더 넓고 포괄적인 의미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가 이루어 졌다.

경실련 준비위가 뜨기 한달 전쯤인 89년 6월 경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그뒤부터 경실련이라는 시민운동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가까운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얘기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기사연원장을 사퇴하고 내가 쓰던 원장실의 바로 옆방인 김용복박사 사무실을 임시사무실로 쓰면서 경실련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함께 의논했던 후배들 가운데 신대균, 유종성, 장신규 등이 초창기 핵심실무자 역할을 맡았다.

새문안교회 후배들 못지 않게 경실련을 만드는 데 주축이 된 그룹은 우리마당에 나오던 지식인 그룹이었다.

나는 당시 우리마당에 나오고 있던 박세일 교수를 만나 경실련에 대한 구상을설명했다. 그랬더니 박교수가 ‘아주 좋은 운동인 것같다. 정책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내가 책임질테니 서목사가 시민운동 부분을 전담해 주었으면 좋겠다’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주었다.

이밖에도 우리마당에 나오고 있던 많은 분들이 동참을 했는데, 그 중에 몇명을 얘기한다면 이근식, 이각범 , 양건 , 이영희, 박기봉, 박재창, 박인제, 안병영, 이인호, 김규칠, 권용우 등이다.

사실상 우리마당 회원들의 대부분이 경실련 초창기 인사로 들어왔다고 봐도 틀리지 않다.

이 가운데 특별히 대단한 열정을 보여준 사람은 이근식 교수(서울시립대 경제학과 교수)였다. 내가 이근식 교수에게 경실련 운동에 대한 나의 구상을 설명해 주자 잠시 뒤 다시 전화가 와서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도 이 운동을 함께 하고 싶다”며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이교수는 대학 시절 경제복지회에서 함께 활동한 친구로 학과는 달랐지만 학번이 같아 대학 졸업 후에도 잘 알고 지낸 친구다. 이교수도 대학 시절엔 나처럼 사회주의 이념에 심취해 있었지만, 그 뒤 나처럼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고 합리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뒤 내가 ‘우리는 왜 경실련을 발기하는가’를 쓰고 이교수가 창립선언문을 쓸 정도로 경실련의 핵심 멤버가 되었고, 초대정책연구위원장을 맡아 정책위원회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 주었다. 강철규 박사, 김태동 교수 등 서울 상대의 많은 교수들을 경실련에 가입시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경실련에 참여한 또 하나의 그룹은 새문안교회 친구들이었다. 윤경로 교수, 이형모 선생을 위시해서 유재현, 서원석, 이숭리, 이숭선 형제 등 새문안교회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오자 마자 새문안교회 친구들을 모아 새마당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한달에 한번 정도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의 회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경실련에 참여했다.

특히 새문안 교회의 가까운 친구들은 경실련을 만드는 데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이희택씨다.

이희택씨는 사실 땅이 많은 ‘땅부자’이다. 당시 제주도에 수십만평의 땅을 갖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내 말을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땅값이 똥값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는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서목사가 이 일을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

그러면서 이희택씨가 선뜻 1천만원을 내 놓았다. 그리고 그 돈이 초창기 경실련을 만드는 자금이었다. 5평 짜리 조그만 사무실에서 간사 5명과 함께 경실련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때 내 월급이 40만원이었다.

경실련 조직작업을 시작하면서 만나게된 또 하나의 그룹은 복음주의 교회 그룹이었다.

내가 기사연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와 한 분 가운데 이만열 교수가 있는데, 그 교수가 나를 복음주의교회 쪽의 많은 분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때 손봉호 교수와 처음 알게 되었고, 박철수, 고왕인, 이문식 등 다른 여러 복음주의 교회 분들과도 친분을 맺게 되었다.

진보교회 진영에서는 유일하게 인명진 목사가 경실련 초창기부터 참여해주었다. 인목사는 과거 산업선교 활동을 함께 했던 가까운 분인데, 내가 기사연 원장에서 쫒겨날 때 그 사실에 대해 무척 분개하신 분이다.

인목사도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호주에서 몇년간 계시다가 나보다 먼저 귀국해 예장 갈릴리교회 목사,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지내며 6.27선언을 끌어내는 주역을 맡았지만, 내가 미국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인목사님도 호주에서 돌아올 당시 생각의 변화가 많았다.

당시 기독교운동권의 분위기가 내가 경실련을 만드는 것에 대해 굉장히 냉담하고 비판적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인목사가 경실련에 참여하는 것은 사실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런데도 인목사는 이런 점에 별로 개의치 않고 경실련에 초기부터 동참했다.

실제로 진보교회의 한 목사님의 경우 내가 경실련 운동에 대한 구상을 설명했더니 “역시 서경석답다. 참 훌륭하고 꼭 필요한 운동이니 서목사가 열심히 해라”라면서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뒤 기독운동권에서 그분에게 ‘경실련에 참여하던지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을 하던지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을 가해 결국 경실련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황인철변호사님과 변형윤교수님의 경실련 참여도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 두분은 기존 운동권의 운동방식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시작한 경실련이 운동권으로부터 받게 되는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셨다.

그밖에도 경실련에 들어온 많은 지식인들이 있었는데, 한상진 교수, 조형 교수 등 많은 분들이 참여를 했다. 대개의 경우 그 분들은 기사연 사건을 바라보면서 내심으로 대단히 개탄했던 사람들인데, 그 뒤 기사연에서 쫓겨난 내가 새로운 시민운동을 만든다고 하니까 기꺼이 울타리가 되겠다고 해서 모여든 분들이다.

말하자면 이렇게 해서 경실련의 초기 골격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리고 변형윤 선생님과 황인철 변호사님을 대표로 모시고 89년 7월 8일 경실련 준비위원회를 정식 출범시키게 되었다.



우리는 왜 경실련을 발기하는가


“지금 각 분야의 사람들, 시민들, 청년들이 모여 경제정의를 이룩하기 위한 시민운동단체를 발기하기 위해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 이제 우리 사회에는 두개의 계급만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주택소유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무주택계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땅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제적 부정의와 망국적 불로소득의 척결 없이는 우리는 한발짝도 민주주의와 통일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고, 또한 우리는 이 땅의 안보를 걱정하는 보수세력에게도 지금의 격심한 경제적 부정의가 척결되지 않는 한 혁명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밖에는 해결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우리들 ‘보통시민’들이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들이 함께 모여 회비를 내고 단체를 꾸려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제적 부정의의 실상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고발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빈틈없는 대안도 학자의 머리에서 보다는 시민들의 생생한 실지 경험에서 더욱 확실하게 찾도록 할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진 대안을 합법화하기 위한 캠페인을 할 사람도 바로 시민입니다.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꼼짝없이 입법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은 할머니, 할아버지, 유모차를 끄는 아기 엄마 할 것없이 모든 시민이 쏟아져 나와 여의도 광장을 꽉 메우며 평화행진을 할 때에만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운동이 바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입니다”

1989년 7월 8일 서울 명동 YMCA강당에서 열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발기인대회 때 발표한 ‘우리는 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발기하는가’라는 글의 일 부분이다.

이글은 내가 발기인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에 두시간만에 쓴 글이다. 이글에는경실련의 출범이유와 앞으로 운동방법에 대한 원칙이 적혀 있는데, 이처럼 중요한 글을 내가 그렇게 짧은 시간안에 쓸 수 있었던가 내가 생각해도 참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경실련이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쓴 글이지만, 나는 지금도 이글을 읽으며 감탄하곤 하다. 이글에서 말한 그때 그 당시의 원칙이나 운동방식이 지금까지도 철저하게 지켜져 오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경실련 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그 당시 경제적 부정의 현실이 너무나도 심각하다는 인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믿었고, 그래서 여러 사회운동의 목표 가운데서도 굳이 경제정의의 실천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두번째는 운동론적 관점에서 볼 때 기존 재야운동과 구별되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국민적합의에 의해 움직이는 그런 운동이 새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운동의 주체는 특정 계급이 아니라 바로 보통시민들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세번째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운동의 목표 뿐만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방법까지도 선한 방법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발기하는가’라는 글에는 이런 원칙이 잘 담겨 있다.

나는 이글에서 우리가 경실련을 만든 가장 큰 이유를 “부동산투기, 정경유착, 탈세, 극심한 소득격차, 불공정한 노사관계, 농촌과 중소기업의 피폐 등 한국사회의 경제적 부정의, 그 중에서도 특히 부동산 투기에 의한 엄청난 불로소득을 시정하는 일을 정부나 정치인에게 맡겨서는 안되고 시민 스스로의 조직화된 힘으로 거대한 압력을 형성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썼다.

나는 당시 운동권에 대해서도 “당장의 민주주의 실천과 노동자들의 권익옹호, 그리고 통일의 과제가 있는데, 당신들이 이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면 “아니오, 우리는 바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산업평화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길이야말로 사실은 경제성장과 복지, 민주주의와 통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라고 대답하겠다고 했다.

왜 민중이 아니고 시민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가 힘을 모으려는 세력은 소외되고 억눌린 민중만이 아니라 선한 뜻을 지닌 가진 자도 이 운동의 중요한 중요한 주체이다. 왜냐 하면 우리사회가 이래서는 안되고 기필코 민주복지사회로 가야겠다고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면 그가 기업인이든 중산층이든 할 것 없이 이 운동의 중요한 구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답변했다. 명백하게 선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이 운동의 주인임을 밝힌 것이다.

실제로 경실련 운동은 노동자와 기업가로 구성되는 생산자층의 편에 서서 불로소득층을 공격하는 운동이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 운동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탐욕과 이기주의를 척결하고 남과 함께 사는 정신과 양보의 정신을 기리는 정신운동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오히려 재산가는 자기 소유를 남과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운동의 아름다운 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굳이 이 운동의 주체를 시민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지 민중과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관심의 대상은 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 때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던 시민들이었다.

우리사회에 정치적 기적을 가져다 주었던 이 시민들이 87년말 대통령 선거유세 이래로 줄곧 관망만 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시민들을 향하여 바로 이 시민들이, 바로 이 보통시민들이 다시금 경제정의를 위한 행동에 참여함으로써 이번에는 분배의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사회는 좌우의 양극적 대립으로 인해 표류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재야운동권의 문제제기를 흡수하는 완충지대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해서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이글에서 시민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위대함을 믿습니다. 우리 국민은 5공이 철저하게 청산되고 민주주의가 각 분야에서 착실히 뿌리내려질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우리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다 함께 잘 살게 되는 사회가 오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비록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확고하게 우리나라가 통일을 향해 착실한 전진을 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은 느린 것같아도 실제로는 자주,민주,통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이 나타나 국민을 안심시킬 때 비로소 국민은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다시금 진보의 대열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경실련은 바로 이러한 국민적 공감대의 지원을 받으며 말 그대로 보통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우리가 토지, 주택문제를 당면과제로 생각하고 있는 이유도 이문제가 일반 시민의 피부에 가장 절실하게 와닿는 문제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운동을 진전시킬 때 비폭력 평화운동의 방식으로, 대중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전개하고자 하는 것도 이때에만 일반시민들이 가장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관념적이고 원칙론적인 주장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시민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였을 때에만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운동은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이 운동은 시민들의 깊은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전략은 온건하고 대중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경실련운동이 현 체제를 안정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가진 자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김빼기 운동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이글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꿈은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입니다. 서민계층의 입장에 확고하게 서서 분배 5개년계획이나 분배 10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성취해내는 것- 이것이 온 국민의 꿈이자 이 운동의 목표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과연 될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앞으로 매진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한가지, 이미 국민들은 이 운동에 열렬한 호응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발기인대회가 끝나고 난 뒤 경실련사무실에는 그야말로 전화통이 불이 날 정도로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하루에 수백명의 시민들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실련은 회원수가 3천명으로 늘어나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문익환목사 방북사건을 보며


내가 한창 경실련을 준비하고 있을 때인 1989년 봄에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88년에 기사연 원장으로 있을 당시 주체사상파가 주도하고있던 운동권의 통일운동을 바라보면서 ‘통일운동이 참 문제구나, 운동권이 저렇게 나가면 안될텐데’하고 걱정을 했었다. 그런데 다음 해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우리사회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급변하였다. 87년 6월항쟁 이후 우리사회를 풍미하던 진보와 개혁의 분위기가 꺾이고 보수반동의 분위기가 사회를 뒤덮게 된 것이다. 그동안 진보와 개혁의 분위기를 대변하던 언론들도 문목사님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보수반동적인 논조로 돌아서 버렸다.

나는 문목사님이 북한에 다녀와서 구속되었을 때만 해도 문목사님을 열심히 변호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문목사님에게 개인적으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무척 가까웠다.

게다가 문목사님의 방북 과정에서 해외동포회의에서 주장한 통일방안 중 몇가지가 관철된 것도 있어서 어떤 측면에서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문목사님은 NL계열인 소위 주사파가 갖고 있던 통일에 대한 입장을 그대로 갖고 계시지는 않았다.

문목사님은 통일문제에 대해서 상당히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입장을 갖고 계셨는데, 이를 테면 남한 정부에서 주장하던 통일방안인 유엔동시가입이나 혹은 교차승인론조차도 ‘우리가 자주적인 통일 의지만 갖고 있다면 그안을 받아들여도 분단고착화로 가지 않고 통일을 향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었던 분이다.

그래서 사실은 당시 주사파 학생들이 문목사님의 통일에 대한 강렬한 의지 때문에 면전에서 비난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문목사님에 대해 꽤 비판을 하곤 했었다.

때문에 나는 기사연사건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통일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문목사님을 열심히 변호하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들의 반응이 너무나도 냉담한 데 놀랐다.

나는 나름대로 문목사님을 열심히 옹호하며 청중들을 설득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설득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설득되지 않는 것에서 한걸음 나아가 항의의 표시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청중들까지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익환 목사님의 실험이 왜 실패했는가’를 골똘하게 고심하기 시작했다.

나는 88년도에 귀국해서 NCC집회에서 토론자로 얘기를 할 때 ‘우리가 이제 국가보안법폐지운동을 벌어야 한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을 어떻게 할것이냐에 대해서는 국가보안법 위반운동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스스로 국보법을 위반해서 이 법이 아무런 도덕성이 없는 법이며, 이미 정당성을 상실한 법이다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지난 박정희정권 시기에 ‘긴급조치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긴급조치를 위반한 사람들로 우리나라 감옥이 철철 넘치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어 우리의 전략은 성공을 거두었고 긴급조치도 폐지되었다.

때문에 나는 마찬가지로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전국의 감옥이 철철 넘친다면 결국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는 그당시 문목사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래서 아마도 문목사님 스스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해야 겠다고 생각하시고 북한방문을 강행하신 것같다. 그런데 그 방법이 이번에는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나는 오랫 동안 고심한 끝에 ‘국민의 마음이 변했구나’라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과거 우리 국민들은 박정희정권이든 전두환정권이든 결국엔 군사독재정권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이런 체제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우리사회의 건강한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었다.

따라서 우리사회의 민주화도 합법적인 운동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말하자면 긴급조치를 위반하는 비합법적인 방법을 통해서라도 정부에 저항하고 항거해서 독재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그런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나섰고 그 결과로 감옥에 가게 되더라도 국민들은 이를 비난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들을 적극적으로 지지 성원하고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을 구속인사 내지 민주인사로 적극적으로 추앙하곤 했다.

그런데 일단 87년 6월을 거치면서 우리사회가 민주화과정에 들어가게 되자 이런 국민들의 생각이 바뀌게 된다. 이제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고쳐나가야 된다는 생각이 국민들의 광범위한 공감대가 된 것이다.

우선 국민들은 그때부터 자기의 일상 생활속에서 정치적인 억압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정치적 억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여전히 화염병을 던지고 미국과 노태우정권에 대해서 극단적인 투쟁을 하는 것을 국민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회운동이 종래와 같은 방식으로 운동을 계속해나간다면 갈수록 국민에게서 멀어지고 국민들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되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이런 국민의 변화된 마음을 정확하게 읽어 그런 요구에 맞는 새로운 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문목사님의 방북사건을 통해 내가 고심 끝에 새롭게 발견한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내가 경실련을 만드는 데 중요한 인식의 토대가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나는 문목사님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이제 더 이상 우리 국민들이 비합법투쟁을 지지하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도 이 사회가 허용하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멍석을 깔아놓고 씨름을 하라고 그러는데 그 씨름꾼이 멍석안에서 씨름을 하지 않고 멍석밖에서 씨름을 하려 한다면 관중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게 되어 ‘야, 멍석위에서 씨름을 해야지 뭐냐’라며 야유를 보내게 된다.

때문에 이럴 때에는 우선 시름꾼은 멍석 위에서 씨름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뒤에 멍석이 너무 좁아 자꾸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게 되면 그때서야 관중들 스스로가 ‘멍석이 너무 작으니까 큰 멍석으로 바꿔야겠구나, 다시 말해 법과 제도를 고쳐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관중들이 이런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선 일단 그 멍석 위에서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합법적인 방식으로 운동에 임하는 모습을 보여준 뒤 국민들 스스로가 기존 법과 제도가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깨달아 그법을 고치는 운동에 지지를 보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에 또 하나의 큰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것이 바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문제였다. 나는 전교조 문제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상당히 긍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

물론 전교조가 갖고 있는 이념적인 문제점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참교육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하고 노력하는 부분들은 높이 평가해야 않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전교조가 원래 갖고 있던 참교육이란 좋은 의도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실패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합법과 비합법을 둘러싼 국민들의 의식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교조 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실수는 국민들의 생각이 합법적인 운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현행법을 위반하면서 출발했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교사들이 스스로 법을 위반하는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바로 전교조운동의 가장 커다란 맹점이었다.

그리고 이런 깨달음은 그뒤 내가 경실련 운동을 해나가면서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운동이라는 원칙을 흔들리지 않고 지킬 수 있었던 좋은 바탕이 되었다.



시민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경실련을 발족하기 직전인 89년 6월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우리사회에 어떻게 진보와 개혁의 바람을 다시 되살려 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산적한 개혁과제들이 있었다. 그동안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왜곡되어 있던 사회 각 분야를 민주화시켜야 하고, 경제개혁도 이루어야 했으며, 과거의 낡은 법도 고쳐야 했다.

이처럼 개혁과제가 산재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보수반동으로 흘러가 버리면 기득권층의 반발이 노골화되어 우리사회의 개혁은 기약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게 나의 우려였다. 따라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사회에 다시 진보와 개혁의 바람을 되살려야 겠다고 생각하고 과연 그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해 나는 모든 생각을 집중시켰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과거 운동권적인 방식으로는 운동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우리사회가 더욱 더 보수반동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혀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등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이유는 이러했다.

나는 1987년 6월 민주화대항쟁을 승리로 이끈 광범위한 시민들의 힘과 열정에 주목했다. 6월 항쟁의 승리는 우리나라의 광범위한 중산층이 기층 민중들과 함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에 저항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민주화대항쟁승리의 가장 핵심적인 요체는 명동의 넥타이부대로 대표되는,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대거 저항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기층운동세력과 함께 힘을 합쳤기에 군, 재벌, 관료 등 막강한 힘을 가진 기득권세력의 완강한 저항을 딛고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과로 민주화과정이 시작되면서 적어도 과거와 같이 눈에 드러나는 물리적인 압력,폭압,압박이 사라지게 되었고, 부족하나마 합법적인 공간이 사람들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일단 이렇게 되자 합법적인 공간이라는 것이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중산층들은 ‘이제 그 합법적인 공간을 통해서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점진적이고 합리적인 개혁을 통해서 우리사회를 고쳐나가야 한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바뀌어 버렸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재야운동세력, 예컨대 기층에 기반을 둔 재야운동세력은 ‘이러한 국면전환으로 본질적인 변화가 이뤄진 건 하나도 없다’며 종래의 과격하고 혁명적인 방법을 그대로 유지시켜 나갔다.

이러다 보니 과거 박정희 전두환정권의 폭압속에서는 재야운동권의 그런 저항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슬금슬금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런 운동권의 과격함을 질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89년의 상황은 이처럼 국민의 마음이 운동권을 떠나가는 상황에 이미 접어들고 있었고, 문목사님 방북, 전교조사건 등이 발생한 뒤에는 사실상 재야 운동권은 국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한 채 고립화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적어도 중산층의 지지는 거의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권력과 힘을 가진 기득권 세력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기득권 세력들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운동권을 고립화시키고,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좌경,용공,폭력이라는 딱지까지 붙여 감옥에 속속 가둬 버렸다.

그런데도 과거 이 사람들을 구속인사, 민주투사라고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일반 시민들은 더 이상 분개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문목사님 방북사건, 동의대사건, 정원식총리 밀가루세례사건과 같은 몇몇 사건을 계기로 일반국민들은 체제안정세력으로 바뀌어 오히려 이 기득권세력들과 부분적으로 결탁하는 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 당시 우리사회 전체가 보수반동의 분위기에 휩싸인 상황적인 배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보수반동의 분위기가 몰아닥친 데 대해 언론, 특히 보수언론이 악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하고 있고, 나도 부분적으로는 이런 지적이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지적이 완전히 옳은 진실을 설명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그때 사회의 변화를 정확하게 읽어 내는 것이 언론의 특성이다. 또한 언론은 절대로 함부로 나서서 총대를 메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언론은 오히려 국민여론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민의 풍향, 여론의 풍향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 지고 있는가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자기의 방향을 그쪽으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보수언론이 활개를 치게 된 현상은 국민들이 보수반동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앞장서서 끌었다기보다 국민들의 바뀐 생각을 보수언론이 발빠르게 대변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한다.

이런 고민을 거듭하면서 나는 우리사회에 진보와 개혁의 바람을 되살리는 방법은 다시금 중산층과 기층민중운동권 사이의 벌어진 틈을 메꾸고 두 계층이 서로 결합하도록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에 중산층과 기득권세력간에 이뤄진 일정한 결합을 단절시켜야만 우리사회를 진보와 개혁의 방향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는 개혁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중산층 보통시민들(아주 엄밀하게 말하면 중산층이라기보다는 중간층)이 주인이 되는 개혁적인 시민운동의 등장이다. 원래 중산층이라고 하면 재산의 소유규모에 따른 분류법이지만, 여기서는 실제 재산규모는 못미치더라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 개혁적인 시민운동이 ‘우리사회의 진정한 이익을 위해서는 개혁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기득권세력의 이익이 지켜지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한다, 기득권세력의 이익을 용인하면 그것은 거꾸로 우리 모든 사람의 공공이익에 피해를 입힌다’라고 시민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일 때 그제서야 대부분의 보통시민들도 비로소 개혁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기득권의 세력과는 우리의 꿈과 염원을 함께 할 수가 없겠구나. 우리의 꿈과 염원을 이루려면 기득권 세력과의 단절이 필요하겠구나’

바로 이런 의식이 보통시민들의 가슴 속에 생겨날 때에만 개혁을 가로막는 기득권세력과 중간층인 보통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깨지고 틈새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경실련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보통시민들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우리사회에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보통시민들은 원래가 보수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개혁을 원한다.

경제정의, 부정부패척결, 평화통일, 민족자주, 민주주의, 지방자치, 환경보존, 더불어사는 사회, 산업평화 등 이 모든 것을 보통시민들도 원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런 것들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지기를 원할 뿐이다. 말하자면 ‘안정 속의 개혁’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보통시민들이 안정보다 개혁을 추구하면 야권이 사회분위기를 주도하고, 이들이 안정을 더 원하면 여권이 득세하게 된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 사회변화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도 이들 보통시민들이 개혁세력을 지지해주는 것이 필요하고, 거꾸로 개혁세력들도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경실련운동을 하면서 이들 보통시민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네들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이제 더 이상 보통사람들이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앞장 서서 여러분의 문제를 이야기하십시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우리사회가 더불어 잘사는 방향으로 갈수가 있습니다’

나는 우리사회가 개혁의 과제를 다 끝내고 난 다음에는 보수의 방향으로 가도 좋다고 생각한다. 보수라는 말뜻이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라고 보면 개혁된 사회에서는 이 또한 좋은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사회는 진보와 개혁이 필요한 사회이고 이를 위해서는 보통시민들이 주인이 되어 사회 정의와 개혁을 위해 싸우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마흔살이 될 때까지 한 가지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민중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릴 적 가난을 모르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때문에 내가 산업선교운동을 하면서 노동자와 같이 감옥을 두 차례나 들락날락하고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음에도 내 마음 속에는 항상 ‘나는 부르조아다’라는 컴플렉스가 있었다.

마흔 살 생일을 맞으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벌써 내 인생의 반을 살았구나. 그런데 여태까지도 나는 내가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는 컴플렉스를 버리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나처럼 이런 컴플렉스에 시달린다는 것도 결코 옳지 못하다. 마흔살이 되어서까지 계급이론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 스스로를 기회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왜 많은 보통시민들이, 그리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기회주의자라는 컴플렉스에 시달리면서 눈치나 보고 살아야 하는가’

나는 그때 ‘이제부터라도 나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많은 보통시민들을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거나 기회주의자라거나 하며 비난하는 그런 운동에 대해서 온몸으로 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경실련을 시작한 뒤 시민들 앞에서 강연할 기회가 생기면 이 말을 자주 하곤 했다. 그러면 강연장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열광적인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그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해방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믿는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건강한 시민들이 그 동안 운동권으로부터 기회주의자, 독재를 눈감는 구경꾼이라고 비난받아왔는가.

거꾸로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수없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소시민이라고 내돌림을 당해왔던가.

바로 이제 이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그럴 때만이 우리사회의 정의와 개혁도 제대로 이룰 수 있다는 원칙이 경실련이 오늘날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토대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나는 운동권에서 쫒겨난 사람이오’


개혁은 얼핏 보면 지지부진하고 더디게 보이지만, 한참 지나고 보면 엄청난 진보를 가져다 준다. 따라서 혁명적 방법보다 합리적인 개혁이 그 사회가 진보의 길로 갈 수 있는 더욱 빠른 지름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급격한 혁명보다 합리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이유다.

하지만 개혁은 한꺼번에 완벽한 것을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불충분한 형태의 개혁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중첩되어 일어나면 한참 지난 뒤에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법이다.

때문에 나는 급격한 혁명을 목표로 하는 재야운동의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층민중운동이 과거의 같이 과격하고 급진적인 운동방식을 유지하는 한 보통시민들은 절대로 지지를 보내지 않는다.

설사 기층민중세력이 재야 민중운동을 지지하고 있더라도 보통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우리사회의 진보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재야운동도 대부분의 보통시민들이 충분히 수용하고 지지할 수 있는 그런 방식, 예컨대 온건하고 합법적이며 합리적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할 필요가 있다.

민중당이 진보적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아야만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당연한 목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말하자면 민중당이 보통 시민들, 소위 중간층의 광범위한 지지와 협력을 얻어내는 방식이 아니라 거꾸로 그 사람들의 지지를 배척하는, 심지어 그 사람들을 내쫓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경실련을 시작하면서 나의 모든 관심을 어떻게 하면 경실련이 보통시민들 속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에 집중시켰다. 운동권으로부터 어떻게 하면 지지를 받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운동권으로부터의 지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보통시민들의 두터운 신뢰와 지지를 받게 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운동권을 얼마든지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는 거꾸로 운동권으로부터 내가 비판받고 내쫓김을 당했다는 사실을 열심히 선전했다. 어디서 사람들앞에서 강연을 할 때 사회자가 ‘이 분은 운동권으로부터 개량주의자로 찍혀 이러이러한 비난을 받는 사람입니다’라고 소개할때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청중들이 내게 가졌던 경계심을 완전히 걷어 버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내 얘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 들였다.

처음 내가 강연을 할때 ‘서경석목사는 빨갱이운동하다가 감방을 세 차례나 들락날락한 사람인데, 무슨 과격한 얘기를 하려고 여기 왔나’하는 식으로 색안경을 쓰고 보던 사람들도 ‘내가 운동권에서 쫒겨난 사람’이라는 사회자의 얘기를 듣고 나면 생각이 바뀌는 것을 수없이 보았다.

그리고 내가 정부의 잘못을 아무리 맹렬히 질타해도 전혀 정서적인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고 스스럼 없이 받아 들였다.

그래서 나는 가끔 ‘만약 내가 기사연에서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시민운동에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서경석 목사도 운동권이 얼굴만 바꾸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운동권의 아류다’라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나는 가끔 ‘하나님이 경실련을 위해 서경석을 예비해두셨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쭐대는 마음 때문이 아니다. 그때의 상황이 나처럼 운동권에서 쫒겨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경실련과 같은 시민운동을 이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많은 시민들이 사회개혁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지지하기를 원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운동권의 변혁론적 사고방식과 과격한 운동방식 때문에 시민들이 선뜻 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득권세력과 손을 잡아 우리사회를 보수반동적 분위기로 이끌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이 볼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유럽의 경우를 보더라도 전쟁 뒤 사회건설의 주역이 된 사람들은 나치치하에서 레지스탕스운동을 주도했던 소위 ‘운동’세력이 아니었다.

극히 일부의 레지스탕스만이 상징적으로 부각될 뿐 실제로 전후사회재건의 주역이 된 사람들은 전쟁 당시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전문가들이었다.

필리핀의 경우도 마르코스 치하에서 무장투쟁을 했던 세력은 그 당시엔 가장 올바른 투쟁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키노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오히려 자기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상황이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재야운동권은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 정의를 위해 싸우고 6월항쟁이라는 큰 성과를 이끌어 내는 주역이었지만, 민주화과정에 들어서는 89년부터는 변화하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종래의 과격한 방식을 고수해 국민들의 지지를 오히려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종래의 변혁적 운동방식이 대안모색 자체를 거부하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기득권세력의 목소리만 키워주는 역효과를 낳기도 했다. 내 경우에도 재야운동단체였던 기사연에서 대안모색 운동을 하려다가 결국 내쫒김을 당한 셈이다.

따라서 나는 경실련을 시작할 때에는 재야운동권과 완전히 단절하고 새로운 방식을 택했다. 재야운동의 경우 변혁론을 수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설 자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항상 상황에 대한 정확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운동권과 완전히 단절을 했기 때문에 우리사회를 정확하게 볼 수 있었고 국민들만을 생각하면서 가장 적확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나는 경실련 초창기 1,2년 동안에 경실련을 보통시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우선 나부터 과거 재야운동을 했을 때 몸에 밴 언어나 행동을 보통시민들의 것으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조직화를 해야 한다느니 무슨 이념이 어떻다느니 하는 표현들은 일반사람들의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

실제로 내가 경실련 회원으로 가입한 일반 시민들을 교육시키고 난 뒤 나중에 평가를 들어보면 내 얘기를 듣고 거부반응을 느꼈다는 시민들도 더러 있곤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우리가 과거 운동권에 있을 때 가졌던 일체의 사고방식, 언어를 모두 벗어버리지 않으면 보통시민들의 운동인 경실련운동도 성공시킬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생각 덕분에 경실련은 보통시민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고, 편안한 마음으로7 동참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을 펴나가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가운데에도 온갖 아이디어가 동원된 대중집회는 매우 신선한 시도로 평가받았다.


‘데모하기 전에는 미장원에 다녀오세요’


경실련이 출범하고 두어달 뒤쯤에 국회의사당 앞에서 토지공개념 확대강화를 촉구하는 시위가 열린 적이 있다.

그 전에 서초동 꽃동네에 비닐하우스를 짓고 살던 도시빈민들이 경실련에 찾아와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경실련이 도와달라고 호소했던 적이 있는데, 이들 꽃동네 주민들도 이 시위에 많이 참가 했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주민들의 옷차림이 아무래도 깨끗하지 못했다. 누가 봐도 금새 ‘저 사람들은 하층민 출신이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내일 집회에 올 때에는 꼭 미장원에 들러서 예쁘게 머리를 단장하고,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옷 가운데 가장 멋있는 옷을 입고 와달라’고 호소했다.

그 시위를 지켜 보는 많은 일반 시민들이 이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위해 참석한 꽃동네 주민이 아니라 우리사회의 공공선을 위해서 참여한 보통시민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경실련은 민중의 집회보다 보통시민의 집회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우리는 2절짜리 마분지에 구호를 쓰고 끈을 단 뒤 목에다 걸고 시위를 벌이기고 했고, 나무판대기나 마분지로 피켓을 만들어 그곳에 구호를 적어 시위 때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은 미국 시민운동단체들이 잘 쓰던 방식인데, 경실련이 처음 도입한 뒤 요즘엔 거의 모든 시민단체들이 시위할 때 이 방법을 쓸 정도로 일반화되었다.

피켓에 쓰는 구호도 일반 사람들이 전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온건하고 설득력 있게 쓰도록 했다.

초창기에는 피켓에 사용되는 구호도 내가 일일이 다 점검했다. 경실련 실무자들의 대부분이 운동권 출신들이어서 자칫하면 과거 운동권적 스타일의 과격한 구호가 등장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시위에 나갈 때에도 가능하면 할아버지들을 시위대 맨 앞에 세웠다. 이런 이유로 경실련 초창기의 집회모습을 담은 슬라이드를 보면 항상 맨 앞에 할아버지들이 쭉 서계신 것이 눈에 띈다.

그분들이 제일 먼저 나가고 젊은 사람들이 뒤따라 나가면 일반 시민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곤 했다. 말하자면 저 시위대야말로 보통사람들의 염원을 대변하는 그런 시위대로구나 하는 것을 느꼈던 것같다.

심지어 나는 사람들에게 시위가 열릴 때엔 가능하면 집안식구들을 총동원해서 데리고 나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경실련 데모가 있을 때엔 내 처는 물론 아들 딸을 다 데리고 나갔다. 특히 아들 기준이가 전단 나누어주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고서는 길가에 나와 있던 시민들이 박수를 쳐주곤 했다.

운동권에서 주로 사용하던 빨간 띠 두르고 손을 치켜들면서 구호를 외치는 행동은 아예 하지 않았다. 많은 일반 시민들이 그런 모습을 보면서 위화감을 느껴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피켓을 들 때에도 아주 순진하게 들도록 당부하기도 했다.

“보통시민들이 데모를 하는데, 어떻게 피켓이 절도있게 척척 올라갈 수 있느냐, 시민답게 약간 엉성하고 순진하게 피켓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야 보통사람들의 일상적인 염원과 바램, 요구들이 그 곳에 묻어 나오고, 그래야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동참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실련에 처음 들어오는 실무자들은 대부분 운동권 출신들이다. 실제로 80% 정도에 이른다.

때문에 나는 실무자들에게 오리엔테이션을 할 때 과거 운동권 시절에 가졌던 일체의 생각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운동권 시절에 가졌던 사고방식, 판단, 논리 이런 것을 다 버리고, 그야말로 보통사람의 눈으로 되돌아와서 보통사람들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바라 봐야한다. 그러면 과거 이념의 프리즘에 의해 모든 사물을 굴절시켜서 보았던 것에서 벗어나 그동안 보지 못했던 보통 시민들의 문제를 전혀 새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바로 그 문제에서부터 경실련 운동을 시작해라. 그리고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운동권적인 방식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상식에 기초해서 해나가라.그럴 때만이 일반 사람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을 것이다”

실무자 오리엔테이션이 있을 때마다 내가 강조한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꼭 한마디를 덧붙인다.

“하지만 운동권 시절에 가졌던 것 가운데 한가지만은 절대로 버리지 말아라. 그것은 맨 처음 운동권이 되려고 마음먹었을 때 가졌던 기본자세다. 인간이 해방되고, 가난이나 억압이나 굴레에서 해방되는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간절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은 절대로 버려서는 안된다.”

이처럼 나는 경실련이 선한 뜻을 가진 많은 보통시민들의 지지를 획득할 때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실련이 5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단체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보통시민들이 경실련을 자신의 운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