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진 신학교에서 되찾은 복음주의 신앙
나는 82년 1월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해 84년 6월에 신학교 3년 과정을 이수했고, 그 다음해 유니온신학교에 들어가 기독교윤리 석사를 86년 취득했다. 그런데 이 5년여의 기간 동안 나는 오히려 복음주의 신앙을 되찾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프린스턴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나는 민중신학적 관점에 서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펼쳤던 기독운동도 모두 민중신학캠프에 속해서 행했던 일이다.
그 시절 나는 ‘누가복음 4장 18절’의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눈먼 자에게 눈뜨게 하리라’는 귀절을 읽을 때면 앞에 나오는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구절은 읽지 않고 뒤에 나오는 해방의 메시지만 즐겨 읽었다.
내가 그랬던 이유는 그 구절의 진정한 메시지는 뒤에 나오는 해방의 메시지이고 앞에 나오는 말은 군더더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때까지 내 경험으로는 성령운동을 하는 목사님치고 눌린 자를 자유케하는 운동을 하시는 분을 보지 못했고, 반면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운동을 하는 분치고 성령을 강조하는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민주화운동에 종사한 지 10년이 지난 이후에 와서는 그 과정에서 겪은 신앙체험을 통해 이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하는 말이 핵심이고 그말 없이는 뒷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70년대를 마감할 즈음엔 다른 사람들이 무신론자라고 말하면 속으로 ‘저사람은 아직 인생의 고난을 겪어보지 않아서 저렇게 경박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정말 죽음 앞에서, 혹은 극한적인 고통 앞에서 깊은 좌절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저런 얘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엔 나는 나의 이러한 신앙경험을 온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신학적 분위기가 완전히 민중신학적이었기 때문이다.
민중 주체론과 민중해방이 강조되고, 예수의 부활마저 민중의 부활로 이해되는 상황 속에서 나는 나의 복음주의적 신앙체험을 신학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한번은 이런 경험도 있었다. 74년에 감옥에 가서 75년에 나온 뒤 크리스찬아카데미에서 개최한 신학세미나에서 발제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내가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발제를 했다가 안병무박사에게 호되게 비판받은 적이 있다.
나는 그때 나의 감옥에서의 체험을 고백하면서 ‘결국은 성령의 역사로 석방 되었다’는 요지의 발제를 했다. 그러자 안박사가 ‘어떤 특정한 사건을 너무 성령의 역사로 연결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며 나에게 신학적인 기초가 너무 없다고 질책했다.
나는 안박사의 비판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민중신학 이론의 대가인 안박사의 비판을 거역할 용기도, 지식도 없었다. 따라서 뭔가 ‘이것은 아닌데..’하는 개운찮은 마음이 들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추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신학수업을 받은 뒤부터 나는 나의 이러한 신앙체험을 신학화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고, 나의 신학적 입장을 주체적으로 세워갈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특히 그동안 비판해왔던 개혁신학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은 민중신학과 전통주의신학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로 합일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칼빈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을 아주 보수적이고 내세적이고 사회문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기적인 신학이라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프린스턴에서 개혁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게 되면서 나는 개혁신학이야말로 풍요롭고 균형잡혀 있으며, 소외된 사람과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는, 그런 신학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뉴욕의 한 교포교회에서 이문영교수님의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이 내용도 나를 복음주의 신앙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교수님은 YH사건의 공범으로 함께 징역살이를 한 분으로 평소에 내가 매우 존경해왔던 어른이시다. 그분은 내가 동일방직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있었던 1980년, ‘김대중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군대영창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영창의 분위기가 워낙에 살벌해서 ‘이제 내가 죽는구나’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죽음을 떠올렸던 그 순간, 이교수님의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은 평소에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였던 자유, 정의, 인권, 민주주의 등이 아니라 전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던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으면 구원을 얻을 것인가’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이교수님은 오랫동안 이 질문과 씨름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그 뒤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단호한 모습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이교수님의 최후진술 내용은 여러 구속자들 가운데서도 유신체제를 가장 혹독하게 공격한 것이어서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이 간증을 들으면서 이것은 이교수님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겪고 있는 공통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 내게 민중신학은 나를 감격시키고 또한 내 자신을 기독교 민중운동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살아 있는 신학’이었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내 자신으로 하여금 전공을 포기하고 진보적 기독교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도록 만든, 일종의 길 안내자였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당한 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메시지만 강조했을 뿐 그 고통의 현장에서의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소홀히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100년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목사님이 많이 계신데, 그분들은 민중신학이나 자유주의신학은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하던 시대의 분들이시다. 단지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강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 분들일 뿐이다.
하지만 이분들은 자기 목숨을 버리는 순교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에 저항하는’ 사회참여도 동시에 실천하셨다.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복음적 신앙이란, 이처럼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도 버릴 수 있는 강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러한 신앙의 강한 힘과 고귀한 가치를 실천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져 보수교회들은 진보교회를 보고 ‘저것은 정치운동이다’라고 비난했고, 반대로 진보교회에서는 보수교회를 향해 ‘저것은 샤머니즘이다’라고 비난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두가지 모두 2천년전 예수의 삶 속에 모순 없이 하나로 용해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령운동이나 사회운동이나 모두 예수님의 삶의 모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분리해서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고 있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민중신학에 심취했던 젊은 시절엔 ‘주의 영이 네게 임하였으니’라는 성령의 역사는 외면한 채 ‘눌린 자를 자유케하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리라’는 해방의 메시지만을 맹목적으로 추종했었다.
그러나 미국유학 시절 이런 민중신학의 한계를 보게 되었고, 결국엔 전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신학교에서 거꾸로 복음주의 신앙으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학생의 견해는 'NARROW MINDED(협소한 생각)'요
유니온신학교에는 베버리해리슨(Beverly Harrison)이라는 급진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는 유명한 신학자가 있다. 나는 그 교수에게 여성신학 강의를 들었는데, 한번은 교포신문에 김근태 선배가 고문을 폭로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났을 때 수업을 받았다.
김선배가 발가벗겨져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박박 기면서 자기의 인격이 완전히 파괴되는 경험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고문을 너무 당해서 발 뒤꿈치에 딱지가 크게 붙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졌다. 김근태 선배는 대학시절 내가 통혁당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받고 나온 뒤 정신적인 상처를 받고 방황할 때 내가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고마운 선배였다.
게다가 그 고문이야기는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받았을 때의 경험과 민청학련사건으로 잡혀서 각목으로 치도곤을 당했던 기억들을 전부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했다. 때문에 김근태 선배의 폭로가 남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나는 그 당시 상당히 감정이 격해 있었다.
그럴 즈음 해리슨교수의 여성신학 강좌에서 헤이우드라는 신학자가 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나는 그들의 주장에 상당히 강하게 반론을 폈었다.
그 책의 요지는, ‘하늘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그런 하느님은 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하나님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고, 진짜 하느님은 이웃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친구처럼 느껴지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인 관계는 틀린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의 참된 관계는 인간과 인간간의 수평적 관계처럼 속삭이고 힘을 주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에 강하게 반론을 제시했다. 나는 “왜, 당신들의 자유주의적 서구신학에서는 우리의 삶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위에서부터 구원의 손길이 내려와서 우리를 절망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없는가?”하고 질문했다.
“감옥에서 고통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 나를 위로하신 하나님, 고문으로 내 모든 인격이 파탄난 뒤 하나님을 향해 울부짖을 때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왕의 압제에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을 때 이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바로 이 강력한 하나님을 우리들 제3세계 기독교인들은 간절히 원한다.
당신들이 이런 하나님을 가부장제적 하나님이라고 비판해도 좋다. 당신들 서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제3세계 민중의 고난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내가 강의실에서 격한 목소리를 주장했던 내용의 요지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그 강의실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유니온신학교에서 또 기억에 남는 강의는 제임스콘의 흑인신학 강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신학자 제임스콘의 강의는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러나 제임스콘의 입장 자체에 대해서 나는 전적으로 지지를 보낼 수는 없었다. 민중과 민중혁명에 관한 절대화라는 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폭력의 정당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알렌보색의 흑인해방 신학은 오히려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알렌보색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만약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하는 용서의 기도를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나는 그책을 읽으면서 소위 개혁신학, 복음주의 신학의 전통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회개혁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고, 죽음을 이길 정도의 강한 신앙적 투쟁이 가능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하기 위해 복음주의신학을 포기하고 민중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빠져 버리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는 그뒤 베버리해리슨 교수에게 여성신학을 급진적인 시각이 아니라 복음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쓴 논문을 제출했는데, 그 논문은 해리슨 교수에 의해 ‘narrow minded’(협소한 생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가장 진보적인 그 신학교에서 서구 자유주의 신학의 끝을 보았고, 다시 전통적인 개혁신학으로 되돌아오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학 시절 내가 혼돈과 방황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훌륭한 신앙선배가 있어서 그분이 이런 복음주의 전통에 기초해서 사회정의를 위해서 투쟁하고 독재와 싸우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내가 과연 그렇게 많은 방황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종종 많은 아쉬움과 회한을 느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89년 미국에서 돌아오자 마자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의 신학생들 앞에서 미국에서 깨우친 대로 성령운동과 사회운동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그리고 내가 이런 강연을 하고 나면 그자리에 참석했던 학생들 중에서 서로 대립되는 경향을 가졌던 학생들이 하나로 합일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곤 했다.
실제로 보수적인 사람이 사회현실과 부딪치며 진보적으로 변하는 사례는 많다. 그러나 진보적인 사람이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거꾸로 복음주의로 되돌아오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나의 신앙간증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같다. 특히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예를 들어 성령의 힘을 강조하지 않는 운동권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느끼고, 그렇다고 ‘믿습니다’를 외치며 오로지 내세주의, 구원주의에 빠져 있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의 간증을 들으며 힘을 얻었다.
양지에 있는 합동측 신학교에 가서 강연했을 때 한 신학생이 와서 내게 “목사님이 우리에게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여태까지는 골방에서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신발을 신고 세상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내 강연이 복음주의 보수신앙을 가진 학생으로 하여금 사회참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다니 매우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꾸로 복음주의를 무조건 거부하던 민중신학 계열의 학생이 신앙과 사회참여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보·보수교회가 하나로 합일되는 변화는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도 거스릴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북한에 다녀온 70대 교포노인의 고백
나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신학적인 측면 이외에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북한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대학 시절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나는 북한을 낙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뒤 기독교운동을 할 즈음에는 사회주의에는 긍정적인 생각이었지만, 현존하는 김일성 체제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내가 이정도라도 균형감각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당시 내가 ‘맑시즘이냐 기독교냐’라는 일본에서 나온 책을 읽고나서 교조주의적 맑시즘의 폐해와 문제점에 대해서 확연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맑시즘의 교조주의화에 대해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비판적인 입장을 가졌었다. 교조화된 맑시즘은 인간이 만든 체제나 이념을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말하자면 내가 대체적으로 가지고 있던 입장은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접목한 기독교사회주의와 같은 방식이었다고 볼 수있다.
하지만 열렬한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체제인 북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 간 뒤에 ‘북한이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실상을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미국에 갔던 1982년도는 미주동포들이 북한 방문을 서서히 시작할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약 5~6년 동안 많은 미주동포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들 가운데는 한 주일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머물면서 북한이 보여주는 부분만 보고 돌아온 사람도 있었고, 한 달 이상 머무르면서 북한사회의 꾸밈없는 실체를 보고 느끼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각각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나 달랐다. 북한에서 보여준 부분만 보고 온 사람은 북한에 대해 감동에 가까운 좋은 인상을 갖고 있는 반면 북한 사회에 깊숙이 들어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아주 냉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두가지 평가 가운데 어떤 것이 진실인가를 가리기 위해 미국에 있는 동안 ‘누가 북한에 다녀왔다’는 소리가 들리면 기를 쓰고 그 사람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 보곤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한국에 있을 때 가졌던 북한에 대한 생각을 많이 바꾸게 되었다. 우선 북한사회가 지상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북한 나름대로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체적으로 사고를 한다든지, 굉장히 순박하다든지 하는 것이 좋은 점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북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인권 문제가 심각해서 일체의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김일성 유일 사상이 사회전체를 이끌고 가는 그런 사회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특히 북한에 아들을 만나러 가서 한달 동안 머물다가 온 한 교포노인의 말은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게 해주었다. 그 노인은 황해도 출신으로 6.25동란 때 월남해 남한에서 결혼했는데, 북한에도 부인과 가족이 있었다.
때문에 그 노인은 북한의 아들 집에서 아예 한달간 머물다가 돌아왔는데, 그 노인이 들려준 북한사회의 실상은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노인이 말하기를 ‘북한사회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을 뿐 아니라 김일성체제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반발도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한국에 돌아올 때쯤엔 재미동포들 가운데 북한을 다녀온 사람이 3천명 정도에 이르러 사실상 북한의 실상이 재미동포들에게는 있는 그대로 노출되어 버리는데, 그 실상이 너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미국생활 6년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내가 갖고 있던 북한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지워버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그 실상을 알면 알수록 그동안 내 생각이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식’ 생각이었는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모택동주의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중국은 ‘홍(혁명)’과 ‘전(전문성)’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회이고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혁명성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노력이었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모택동을 적극적으로 추앙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4인방이 무너지고 등소평이 등장했을 때 나는 4인방의 붕괴에 대해서 매우 안타까와 했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을 열심히 만났다. 이들을 통해 중국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모택동과 4인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나는 리영희교수가 쓴 ‘8억인의 대화’라는 책의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국에서 나의 이러한 시각이 중국을 제대로 바라본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그 당시 중국에는 비교적 개방적인 등소평체제마저도 반대하고 비판하는 민주화운동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 반체제인사들이 미국에 지부를 만들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에 내가 중국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미국에서 6년간 있으면서 그밖의 공산권국가에 대해서 가능하면 많은 지식을 흡수하려고 애를 썼는데, 알면 알수록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회의를 깊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미국 6년 동안 사회주의가 우리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험을 갖게 되었다.
사회주의국가에서의 기독교
나는 유니온신학교 석사논문으로 사회주의국가 속의 기독교를 썼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흥미로운 한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논문 주제를 이것으로 정했던 것은 사회주의국가에서의 기독교가 사회주의적 모순 속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두가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는 체제를 인정하는 종교, 즉 어용종교였고, 또 다른 하나는 체제에 저항하는 종교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되었는데, 바로 이런 것이다.
사회주의국가의 경우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진보적인 기독교가 어용종교의 역할을 담당하고, 복음주의기독교가 오히려 저항적인 종교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를 테면 중국의 경우에도 진보교회인 ‘삼자교회’는 사회주의권력, 정권과 결탁한 교회라고 한다면 복음주의교회인 ‘가정교회’는 저항적인 교회다. 가정교회는 개인 영혼의 구원문제를 강조하는 매우 복음주의적 자세를 갖고 있는데, 이 런 교회는 대개 사회주의국가 안에서 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비단 중국의 경우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니카라과, 큐바 등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큐바 장로교회의 신앙고백문을 가지고 한 학기 동안 유니온신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속내용을 들여다 보면 큐바 사회주의 정권과 완전히 결탁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큐바교회 사람들은 그것이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어용노선이었다.
나는 인간주의적 혁명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 니카라과 사례도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84년 가을에서 86년 당시에는 유니온신학교의 교수나 학생들의 상당수가 니카라과 혁명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던 니카라과 정권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선거를 통해 혁명세력이 정권을 잃어버리고, 나중에는 자본주의 세력으로 권력이 넘어가고 말았다. 물론 사회주의 정권이 권력을 잃었다고 그게 곧 바로 자본주의가 옳고 혁명세력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니카라과 혁명세력이 저지른 잘못이 무척 많으며, 그 결과 국민의 신임을 잃어 버리고 지지도 상실하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한 타격이 이런 상황을 좀더 빨리 오게 만들었겠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갖는 여러 모순이 없었으면 이처럼 정권의 붕괴가 빨리 오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견은 한국에서의 나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가 사회주의국가와 정반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70년대 독재정권 아래서 우리나라 기독교는 하나는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형태로, 또 하나는 독재와 결탁하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진보교회와 복음주의교회의 역할이 사회주의 국가에서와 뒤바뀐 형태였다.
진보교회가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며 독재정권에 저항했다면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그와 반대로 사회참여는 외면한 채 개인의 구원에만 치중해 사실상 독재정권에 협조하는 어용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지나간 70년대 기독청년운동과 산업선교운동을 하면서 명확하게 민중신학의 입장에 서 있었는데, 나와 같은 민중신학쪽 사람과 복음주의 교회의 사람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를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누가복음에는 ‘너희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의 주인’이라는 구절이 있고, 마태복음에는 ‘너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하는 구절이 있다.
우리는 누가복음 편이었다. 말하자면 가난한 자가 천국의 주인이라는 메시지를 우리는 믿었다. 반면 복음주의 교회 사람들은 천국의 주인은 꼭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주장했다.
사실 모든 진리의 근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고 있고,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나 모두 2천년전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것에 대한 증언이다. 그런데 그 증언들 사이에 대립이 생기고, 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태가 빚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프린스턴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 두가지 메시지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사건을 함께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는 정신박약아인 동생이 하나 있었다. 이름이 현석이였는데, 17살 되던 해 정신박약아 합숙기관에서 집에 가겠다고 혼자 나오다가 중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애를 잃고 말았다. 그 뒤 우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몇달 동안 현석이를 찾았으나, 결국엔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현석이를 통해 소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어머니께서는 현석이가 정신박약아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모든 문제를 현석이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하셨다. 때문에 우리 네 형제들은 항상 뒷전이었고, 이것이 때로는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만약에 그때 어머님이 오로지 막내동생의 편에 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다섯 형제에게 골고루 시간을 나누어 주었다면 그것은 막내동생을 포기한 것과 다름 없었을 것이다.
결국 막내동생의 편에 섰다는 것 자체가 부모님이 다섯 형제에 대해 보편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서 나는 소위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주류신학과 하나님 사랑의 당파성을 강조하는 민중신학, 해방신학이 서로 대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이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거나 가난한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라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라고 하는 소위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나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은 하나님 사랑의 당파성,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라는 입장을 택했다. 그런데 이 두가지 입장은 상호보완적인 것이지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사람만이 천국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온 인류의 구원을 배격하고 도외시한다면 그것 또한 성서가 애당초 얘기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내가 프린스톤과 유니온을 거치면서 갖게된 결론이었다.
나는 거기서 우리가 계급적 입장을 갖지 않으면서도 가난한 사람 편에 설 수있는 진리, 방안을 터득했다.
그동안 전통적인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도외시해왔고, 반면에 그것에 저항한 민중신학운동은 가난한 사람만이 천국의 주인이라고 하는 당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두개가 분리되고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져야 되는 것이다.
‘엑셀’승용차 미국상륙의 감격
객지에 나가면 고향집 처마끝도 그립다고 했던가.
내가 미국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엑셀자동차’가 미국으로 수출되었는데, 이것은 미국교포들에게 엄청난 자극이 되었고 교포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내가 살던 집 아래에 살던 어느 교포는 차를 한대 갖고 있으면서 엑셀자동차를 한 대 더 샀다. 물론 가격이 싸고 성능면에서도 괜찮았기 때문이었지만, 한국의 눈부신 성장에 대한 감격도 차를 한 대 더 구입한 큰 이유였다. 그리고 이런 교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엑셀자동차의 미국 상륙’은 내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에 입각해서 한국경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경제의 경우 대외의존이 너무 심각해 세계 경제체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경제가 왜곡된 형태로 성장할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국민의 생활도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세계경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경제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가 비탈길을 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어느 때인가 ‘꽝’하고 파국이 올 것이다”
1979년 내가 품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은 미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프린스턴 졸업논문으로 종속이론을 썼는데, 논문을 쓰느라 종속이론에 대한 여러가지 다양한 시각을 비교·분석하면서 내가 한국에서 품고 있었던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균형잡히지 못한 것인가를 절감했다.
우선 종속이론을 공부하면서 나는 동남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 말하자면 한국, 대만, 홍콩, 싱카폴의 경우는 종속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종속이론이란 세계 자본주의사회를 중심부자본주의와 주변부나라로 구분할 때 주변부자본주의는 중심부와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저개발을 할 수밖에 없고, 경제도 마이너스 성장을 할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거꾸로 중심부와의 관계 속에서 의존적이기는 하지만 계속 성장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실제로 내가 ‘곧 파탄사태가 닥칠 것’이라고 예상했던 1979년에 우리나라 경제가 가장 놀랄만큼 발전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낯 뜨거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충격적인 사례는 이밖에도 많았다. 미국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제품들이 미국의 K-mart 등 중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백화점을 휩쓸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나는 감명을 받았다.
‘아무리 보세가공품이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후진국인 한국의 상품이 선진국인 미국 시장을 휩쓸 수 있단 말인가. 종속이 심화되고 있는 한국 경제의 어디에서 이런 힘이 나오는 것인가. 아마도 이것은 눈에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고 좀더 깊게 알고 나면 종속이론에서 말했던 문제가 분명히 숨겨져 있을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내가 한국에서 믿었던 종속이론, 사회주의적 신념들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납득할만한 증거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다가 결국 엑셀 자동차의 미국상륙 모습을 보게 되었고, 내 생각이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친 편견이었는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미국의 도로를 쌩쌩 달리는 엑셀승용차를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 나처럼 종속이론을 신봉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한국같은 후진국도 미국같은 선진국에 자동차를 팔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그것의 성취를 위해서 불철주야 일을 해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이 나처럼 종속이론에 심취해 우리와 같은 후진국은 절대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체념과 절망 속에서 살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을 가졌던 것에 대해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나는 그들이 나같은 운동권이 아니었던 것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여태까지는 어두운 뒷골목에서 숨어서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아왔지만, 이제부터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 이제는 앞마당에 나와서 밝은 개명천지에서 대기를 호흡하면서 많은 보통사람들과 함께 생각하면서 살아가겠다‘고.
대학시절 이래로 나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꿈꿨었다. 그리고 이처럼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모든 사람이 골고루 균등하게 살아가는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물론 혁명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한 그림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혁명적인 방법이 불가피하다는 생각만은 흔들리지 않고 갖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6년 동안 지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웨덴이나 독일과 같은 북유럽의 민주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국가의 사회적 시장경제체제가 그래도 이상적인 사회의 모델에 가깝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에 기초하되 자본주의가 가져다 주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정부가 개입해서 시정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실현하는 나라. 이것이 앞으로 한국이 나아갈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또 하나 미국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한국사람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에 관한 것이다. 나는 뉴욕의 한국 교포들이 이민온 지 10년 안팎의 짧은 시간 동안 뉴욕의 청과시장, 드라이클리닝, 수산시장 등을 완전히 장악한 것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한마디로 한국 사람들의 저력과 가능성을 눈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사람들과 미국사람들이 삶에 대해 갖고 있는 자세가 굉장히 다르다는 것도 실감할 수 있었다. 미국사람들이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한국 사람들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모든 것들을 보고 겪고 느끼면서 ‘내가 죽기 전에 우리나라가 미국을 능가하는 날이 반드시 오겠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 확신의 바탕에 어떤 경제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에서의 6년 세월 동안 직관을 통해 얻은 확신이었다.
한국의 청년, 미국의 청년, 그리고 교포청년
우리 부부는 함께 공부를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미국으로 떠날 때 가지고 갔던 2천불 이외에는 모든 유학비용을 나와 처가 미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충당했다.
내 학비는 이승만 목사님께서 주선해주신 미연합장로교의 장학금으로 충당했고, 생활비는 내가 한인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며 받은 사례비와 아내가 한인가게나 한글학교 교사를 하며 번 돈으로 메꿨다.
그때는 1불짜리 지폐 한장을 쓰는 것도 아까워할 정도로 내핍생활을 했다.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인지 지금도 나는 한국 돈 1천원을 쓰는 건 별로 개의치 않다가도 미국돈 1불을 쓰는 것은 웬지 큰 비용을 쓰는 것같아 선뜻 쓰지 못하고 주춤하곤 한다.
한 마디로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어려운 신학수업을 받느라 고생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생활비와 학비를 버느라 이리 저리 뛰어 나녀야 했던 고달픈 시간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군사독재 아래서 시달리고 있는 우리나라의 어려운 상황을 뒤에 두고 혼자 유학을 떠나왔다는 죄책감이 늘 나를 괴롭혔다. 특히 ‘문부식군의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김근태선배 고문사건’ 등의 진상을 교포신문을 통해 접했을 땐 나혼자 미국에서 편하게 지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무척 괴로웠다.
그리고 시간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교포사회에서 기독학생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나 YMCA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교포청년들을 만나는 시간이 많았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며 교포청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 교포사회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다.
교포사회의 현실은 한국의 현실과 매우 다르다. 이들이 이민을 갈 때는 미국에 가서 성공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교포 1세는 언어 장벽 때문에 미국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결국에는 경제적인 안정을 얻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한 많은 교포1세들은 적어도 경제적인 면에서는 미국사회에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늘 주변부 삶을 살았던 교포1세들은 자기의 2세들만은 미국사회에서 주인으로서 대접받으며 크게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이런 생각도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2세들은 언어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색 때문에 대개 부모와 같은 좌절을 겪는다. 미국은 철저하게 백인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결국 2세들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주변화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뉴욕의 부르클린 한인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있으면서 대학생 청년들과 대화하거나 고등부 지도교사를 하면서 교포청년들의 이러한 현실과 고민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위해 청년운동을 도와야 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우선 교포청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척 마음이 아팠다. 교포청년들은 눈빛부터가 한국의 청년과는 많이 다르다.
그당시 내가 기억하는 많은 한국의 청년들은 조국의 앞날을 위해 온갖 탄압도 마다 않고 민주화운동에 뛰어 들었고 눈빛도 그런 순수한 열정만큼 맑고 또랑또랑했다. 하지만 내가 미국에서 본 미국청년들은 사회의 민주화나 소외된 이에 대한 사랑 등을 위해 몸을 던지는 그런 모습은 거의 보기 드물었고, 그저 ‘엔조이’,‘쾌락’, ‘물질적 부’를 얻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경우가 많았다.그리고 교포청년들도 이런 미국청년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처럼 그 사회에서 주인으로 대접받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이런 교포청년들에게 민족적 아이덴터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각성시켜 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들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인종차별과 주변화되고 있다는 소외감을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좀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처음엔 대부분의 교포청년들이 자신이 코리안이라는 것을 매우 싫어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코리안이라는 민족적 주체성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하고 민족교육도 받고 싶어 했다.
대부분의 2세들은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인으로서 긍지를 느낄 수 있을 만한 한국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모두 미국인에 관한 것이었고 자신이 유색인종으로 미국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갈등만 커져갔다.
2세들이 이처럼 혼돈 속에서 지내고 있는데도 부모들은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우선 흑인 등 다른 유색인종들과 연대해서 미국사회를 좀더 차별이 없는 다원적인 사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며, 이 일에 한인들이 좀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앞장설 수 있는 청년단체를 만드는 데도 앞장섰다. 교포청년들의 조직인 청년동우회가 그것인데, 이 모임엔 변호사, 대학생 등 20~30세의 교포청년들이 15명 가량 가입하게 되었다. 나는 유학생의 신분이기 때문에 직접 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고 조직을 만드는 일만 도왔다.
그러면서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흑인과의 대화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한인교회 교인들과 할렘 흑인가의 장로교회 교인들이 만나서 서로 대화를 나누게 했다. 코리안과 흑인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엔 흑인과 한인 사이의 분규가 극심했다. 한국인들은 대개 흑인동네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면서도 흑인들을 매우 멸시했다. 그래서 한·흑 충돌이 잦았다. 때문에 한인들과 흑인들이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대화프로그램을 기획 추진하는 일이 필요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 경찰들의 횡포에 대한 항의운동을 폈다. 미국의 백인 경찰들의 흑인혐의자에 대한 잔혹한 폭력은 더러 흑인폭동을 유발시킬 정도로 극심했다. 그런데 한국인에게도 종종 그런 일이 발생했다.
한번은 미국경찰들이 한국사람에게 잔인하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소식을 듣고 퀸즈에 있는 경찰소 앞에서 청년동우회가 주최가 되어 규탄 데모를 열기도 했다.
이들 청년동우회의 활동은 한인사회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그것은 그전에는 한인사회에 그런 성격의 모임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연구나 문제인식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의미의 청년운동은 처음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청년동우회 조직을 지원하고 활동을 도우면서 교포청년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되찾았을 때 얼마나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으며, 결국 이들은 영어를 잘하거나 한국말을 잘하거나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민족공동체로 묶일 수밖에 없는 한민족임을 절감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내가 뒤에 경실련 국제부를 통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교포청년들과 입양아들을 중심으로 한민족공동체운동을 펴는 사실상의 계기가 되었다.
뉴욕에서의 민주화운동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나는 앞으로의 진로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의 시간을 미국에 건너올 때 가졌던 목표인 신학공부에 바칠 것인가, 아니면 민주화운동에 바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정권의 독재에 시달리고 있던 한국의 상황은 내게 민주화운동을 선택하지 않을 수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나는 85년부터 한국에 돌아오기 직전인 87년말까지 약 3년동안 뉴욕의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그 당시 한국의 상황은 80년대 초반의 침체기를 벗어나서 민주화운동이 그 힘을 키워나갈 때였다. 때문에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데모가 간간이 일어 났는데, 처음에는 뉴욕영사관 앞에서 데모를 할 때만 해도 참가자가 20명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수적으로 미미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뉴욕을 떠나기 전까지 반드시 영사관 앞 데모숫자를 1백명 이상으로 넘겨 놓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결국 교포사회의 민주화운동이 발전해서 2년 뒤 뉴욕영사관앞에서 개최된 데모에는 참가 숫자가 1백50명으로 늘어났다.
1987년에는 국내와 마찬가지로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한국의 민주화가 머지 않아 가능해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기 시작했는데, 4·13호헌조치가 나자 교포사회도 크게 낙심에 빠졌다.
그 당시 나는 뉴욕의 한미일보에 논설위원이라는 파트타임 일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지금은 실망할 때가 아닙니다’라는 글을 썼다. 이글은 당시 침체되었던 교포사회에 상당한 자극을 주었다.
호헌조치가 내려진 뒤 한국에서는 삭발, 단식 등의 운동들이 전개되었다. 나는 미국에서도 한국을 지원하는 대대적인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선 워싱턴 D·C에 가서 워싱턴민주화대행진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사람들은 한번도 5백명 이상 모여본 적이 없을 뿐더러 대규모의 대회를 해본 적도 없어서 대행진과 같은 큰 시위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최선을 다해서 설득했다.
“지금 한국에서는 교수, 목사, 학생들을 가리지 않고 삭발과 단식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을 것같다고 주저앉으면 나라가 이처럼 위기를 맞았을 때 우리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우리도 삭발을 하거나 단식을 해서라도 힘을 모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나의 설득이 사람들을 움직여 목사님 10여명이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층계에 모여서 농성을 했다.
여름 땡볕이 뜨겁게 내리 쬐는 의사당 층계에서 10여명의 목사님들이 3일 동안 단식농성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 그곳에 모인 목사님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 교포사회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교포신문들이 앞다투어 취재해갔고, 그 다음 5월 10일 워싱턴백악관 앞에서 대대적인 교포들의 시위가 열렸다. 워싱턴의 한 민주단체와 정의평화민중연합 두 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행사였는데, 워싱턴 교포사회 사상 전무후무할 정도의 숫자인 1천명의 교포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그날 시위의 광경은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6,7시간 자동차를 타고 와서 시위에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공병우할아버지가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시위에는 참가해야 한다’며 노구를 이끌고 오셨던 모습이다.
한 마디로 우리 민족의 엄청난 저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어려울 때 하나로 뭉칠 수 있는 힘, 떠나온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생업도 뒤로 미룰 수 있는 조국애. 많은 사람들이 이 시위에 참여해서 목이 멘 목소리로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쳤고, ‘미국은 독재정권을 지원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때 나는 미국식 시민불복종운동을 실제 시위에 적용해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데모를 하면 경찰이 폴리스라인을 정해둔다. 그러면 시위대는 그선 바깥에서만 시위를 해야 하고, 만약 시위대가 폴리스라인을 넘어서면 그 자리에서 연행되고 벌금을 물게 된다. 그런데 때로는 시위대들이 일부러 정치적 목적으로 법을 어기는 일을 하는데, 이를 시민불복종 운동이라고 말한다.
우리도 이날 이런 시위방법을 동원해 시위의 효과를 증폭시켰다. 시위대가 한국대사관 앞까지 행진을 하고 거기서 몇 사람이 크로스 라인을 넘어서면 그 사람들이 연행되고 나중에 벌금을 내고 석방이 되는 방법이었다. 이날 워싱턴시위는 미국의 신문에도 크게 보도될 정도로 미국사회의 관심도 끌었다.
그 뒤에도 한국의 상황은 별로 호전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좀더 큰 대규모 교포시위를 계획하고 실천에 옮겼다. 곧 이어 뉴욕에서 민주화대행진을 제창하고 곧 바로 뉴욕민주화대행진 준비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뉴욕민주화대행진 준비위원회를 급하게 만들어 내가 사무총장이 되어 6월 20일 뉴욕민주화대행진을 조직했는데, 이 시위에는 뉴욕교포 역사상 처음으로 3천명이 교포들이 참가했다.
UN본부 앞에서 총영사관까지 길거리가 완전히 시위대에 점거되었다. 그야말로 뉴욕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날의 시위는 그날 뉴욕 3대 메이저 TV채널의 톱뉴스가 되었다. 이날의 시위는 내가 뉴욕에서 펼친 3년 동안의 민주화운동에 대한 총결산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미국 교포사회 사상 최대 규모인 이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뒤 나의 대중노선이 성공을 거뒀다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뉴욕에서는 청년활동조직을 갖고 있었지만 전국적으로는 북미주 한인기독학자회의 총무일을 하고 있었고 민주회복통일촉진 국민연합의 사무총장일도 하고 있었다.
대체로 북미주민주화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셈인데, 민주화운동이 점점 커지면서 그러한 정도의 조직으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민주국민협의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L.A, 시카고, 뉴욕, 워싱턴은 물론 샌프란시스코, 아틀란타, 시애틀, 보스톤 등 북미주의 10여개 도시를 총망라하는 시민운동 조직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북미주에서 100만불 정도의 돈을 모아서 한국에 보내는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그 일을 진행하다가 6.29 선언이 나서 결국 그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때문에 6.29 선언이 나온 것에 대해서는 무척 기뻤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달만 늦었어도 북미주의 동포들이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했다는 보람과 자긍심을 느낄 수있었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 당시 북미주 동포들이 100만불을 모금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이외에도 나는 ‘재일한국인 인권향상 국제캠페인’이라고 하는 국제조직을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었다. 1986년경의 일인데, 그 당시 재일한국인들의 지문문제가 큰 사회문제가 되었을 때였다.
결국 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협력을 얻어 재일한국인의 인권향상을 위한 국제조직을 만들고 국제적인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단체에서도 사무총장을 맡아 제시잭슨 목사에게 우리의 뜻을 전하고 재일한국인 인권향상 국제캠페인에 공동의장이 되달라고 요청해서 동의를 얻었다. 재일한국인으로 이인화 목사님과 WCC총무를 공동의장으로 추대해 3사람의 공동의장을 갖는 세계적인 기구가 탄생했다.
그리고 각 도시에 연락해서 같은 날(아마 8.15를 전후해서) 같은 시각에 전세계 10개 도시에서 지문반대 공동시위할 것을 제안했는데, 많은 도시에서 적극적인 호응이 있었다.
시애틀, 포틀랜드,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L.A, 토론토, 프랑크푸르트 등이 그때 당시 공동시위에 참가한 도시들이다. 제시잭슨 목사 일행은 한국에 들어갔다가 일본으로 건너간 뒤 오사카의 한국인촌을 방문해 그곳의 재일동포들과 함께 지문날인 반대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것은 지문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조성을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는 이런 일을 보면서 교포들이 자신과 같은 해외동포들의 아픔에 무척 민감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해외동포들의 정신적 유대가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이런 생각 또한 나중에 내가 경실련 국제부를 통해 한민족공동체대회를 개최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나는 이 일을 위해서 북미주를 돌면서 시위를 조직을 했는데 이 일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험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세계적인 인권목사인 제시잭슨 목사와도 깊은 친분을 갖게 되었다.
미국은 어떤 나라인가
내가 한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70년대만 해도 미국을 둘러싼 논쟁이 그렇게 극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80년 광주사태를 겪으면서 한국에서는 운동권의 구호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반미’일 정도로 미국에 대한 반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벌이는 민주화운동이 무조건적인 반미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미국에서의 민주화운동은 미국정부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도록 압력을 넣고 요구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 국민의 생각과 민주화운동의 추진 상황을 정확하게 알려서 미국 정부가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것이 자신들의 국익에 이롭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사람들은 흔히 모든 정치적 사건의 이면에는 미국의 음모가 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그것과 무척 다르다.
나는 미국이 ‘자기나라의 국익에 어느 쪽이 더 유리한가’를 쫒아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실용적인 국가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대한정책이라는 것도 ‘자신의 국익에 유리한 것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는 종속변수이지 고정된 변수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여하에 따라서 미국의 대한정책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나는 실제로 미국에서 한국내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높아지자 미국정부의 입장도 거기에 맞춰서 수정되는 것도 직접 목격했고, 이런 미국의 모습은 내 생각에 좀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한번은 뉴욕에서 내가 창립한 단체인 정의평화청년연합이 주최해서 솔라즈하원의원(아시아태평양소위위원장. 하원) 초청만찬을 열었던 적이 있다. 그때 솔라즈가 처음으로 한국의 핵주둔을 반대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솔라즈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도록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정의평화청년연합이었다.
우리는 사전에 솔라즈의원을 몇차례 만나서 한국에 핵주둔하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가를 설명하고 지지를 요청했었는데,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솔라즈의원이 결국엔 ‘한반도 핵주둔 반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나는 미국에 대한 접근을 상당히 실용적으로 했던 셈인데, 교포사회에서 나와 별도로 민주화운동을 펴고 있던 윤한봉씨는 나와 운동방법이 좀 달랐다.
윤한봉과는 그전에 민청학련 사건 때 같이 감옥에 간 데다 안양교도소에서 한방에 수감되어 생활했던 적도 있었던 까닭에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윤한봉씨는 내가 미국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밀항을 해서 미국에 왔는데, LA에 민족학교를 열고 교포청년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당시 나는 뉴욕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있었고, 이신범씨는 워싱턴에서 일했는데, 윤한봉씨는 나와 이신범씨와는 달리 급진적인 운동방식을 택했다.
제3세계 운동과 연대해서 미군철수를 주장했고 북한에 대해서도 오랜 기간 동안 비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다 보니 윤한봉의 노선을 교포사회에서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우선 교포사회의 지지를 얻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미국의 정책을 바꾸려면 미국의 영향력 있는 중요인사들의 생각을 바꿔야지 급진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한 두명의 국회의원과 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끌던 정평연에서 진보적 성향을 가진 몇몇 하원의원들을 두고 굳이 솔라즈의원의 핵주둔반대선언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던 것도 솔라즈의원이 갖는 미국내에서의 정치적 위치를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가 미국의 정책을 반대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미국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고 있어서는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민주화운동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윤한봉은 광주사태의 충격 때문에 노골적인 반미운동을 폈다. 당시엔 국내에서도 반미운동이 거세게 번졌는데, 윤한봉은 이런 국내의 청년운동과도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윤한봉은 비록 급진적인 노선을 택하고 있었지만, 매우 헌신적인 자세로 민주화운동에 몸을 바치고 있었고, 이런 윤한봉의 태도가 많은 교포사회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기도 했다. 실제로 윤한봉은 그 당시 ‘한국이 민주화되기 전에는 결혼하지 않겠다’고 독신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도 윤한봉의 이런 헌신적인 자세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했지만, 운동의 구체적인 방식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나는 윤한봉 그룹과 상당한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그것이 나중에 ‘서경석과 이신범, 그리고 윤한봉이 미국에서 세력타툼을 벌인다’는 식으로 국내에 전해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처럼 대립적이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잘 풀어갈 수 있었는데, 나 자신의 부족함 탓으로 노선차이의 문제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했다고 생각되어 부끄럽다.
어찌 되었건 나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미국이라는 나라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윤한봉 그룹과의 갈등은 뒤에 내가 기독교사회연구원 원장을 맡았을 때 실무자들로부터 ‘개량주의자’라는 집중적인 비판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년 뒤늦게 받은 목사안수
나는 1985년 12월 15일 부르클린 한인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사실 나는 목사안수를 한 1년쯤 당겨서 받을 수 있었다. 나는 한 해전인 84년에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목사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목사고시는 영어로 보는 시험인데, 우리나라의 목사고시와 출제의 방식이 좀 다르다. 우리나라의 목사고시는 성경구절을 많이 외워야만 볼 수 있는 형태의 시험이라면 미국의 목사고시는 목회를 할 때 부딪히는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묻는 응용시험의 형태로 치러진다.
성경지식을 평가하는 기본시험을 치르고 응용시험을 치르는데, 이 응용시험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정답이 없는 시험이어서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나는 이 시험을 84년 프린스턴신학교를 졸업하면서 통과해 뉴욕노회에서 신학생으로서 목사자격 요건을 모두 갖췄지만, 그러나 목사안수는 1년 정도를 미룬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내가 스스로를 돌아볼 때 목사가 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윤한봉 그룹과의 노선갈등으로 정신적으로 날카로와져 있을 때였다. 특히 그 즈음 내가 프린스턴 시절 조직했던 청년동우회 후배들이 윤한봉 쪽으로 넘어가는 일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서로가 감정적으로 상처를 입으면서 반목의 골이 깊어졌다.
목사고시에 합격한 며칠 뒤 나는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았다.
“과연 내가 그 후배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풀고 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는가”
아무래도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는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목사안수’를 그런 마음의 상태에서 받아서는 안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한 해가 지나고 난 1985년 12월 내가 그들을 충분히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된 다음에야 비로소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나의 목사안수예배에는 이승만목사님(나중에 미국기독교협의회 회장을 지냄)이 설교를 해주셨고, 토론토의 이상철목사와 뉴욕교계의 안중식목사, 함성국박사, 손명걸박사 등이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그런데 한가지 목사안수와 관련해서 공개해도 좋은 부끄러운 일이 있다.
사실은 나는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 담배를 끊지 못했는데, 담배 피우는 일이 목사안수받는 날 아침까지도 계속 되었다.
그리고 안수를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담배를 전혀 피지 않는다.
대학 2학년 시절 내가 가지고 있던 알량한 선민의식을 버리기 위해 박하 담배 17대를 한꺼번에 피운 뒤부터 시작된 20여년 동안의 질긴 흡연습관도 ‘목사안수’라는 대사건 앞에서는 힘을 못썼던 것같다.
지금에 와서 회고해보면 목사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이처럼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나는 목사안수를 받은 뒤부터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그전의 나는 성경말씀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철저하게 성경말씀을 지키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내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사가 되기 전에는 성경을 읽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나오면 슬쩍 넘어가버리곤 했다.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라’라든가 ‘선으로 악을 이기라’든가 등의 구절이 나오면 못본척 넘겨 버렸다. ‘데모를 하려면 독재정권에 대해 적개심을 가져야 하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니..’ 등의 이유를 대며 나는 이런 구절을 어물쩍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목사가 된 뒤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목사가 된 뒤부터는 교인들 앞에서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설교의 텍스트가 성경인데, 내가 성경대로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내가 한 설교를 스스로가 어기는 셈이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목사님’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나는 매일 매일을목회자의 심정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나는 내게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많은 교인들을 보면서 “내가 목사로서 부족한 것이 없는가, 내가 하느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하는 반성을 하곤 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많은 유혹과 갈등 속에서도 내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큰 힘이 되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