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공대 학생회선거의 값진 교훈
나는 비록 공대생이라는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서울공대생이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 하나를 갖고 있다. 서울공대 학생회선거를 정화시켰던 경험이 그것이다.
나는 서울공대에 처음 입학했을 때 학생회장 선거가 너무나 부정선거로 얼룩져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을 했던 적이 있다. 그 당시엔 학생회장에 나올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선거가 돈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학연과 지연으로 인한 후보와 지지자간의 반목도 극심했다. 대부분 경기고와 호남지역 학생들이 손을 잡고, 서울고, 경복고와 영남지역 학생들이 손을 잡아 서로 대결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서로간에 직책을 주는 대신 표를 얻고, 금품향응을 제공해 표를 사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벌어 졌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관행을 뿌리뽑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리고 3학년 2학기때 드디어 이 결심을 실천에 옮기게 된다. 우선 나는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 기숙사에 가서 각 고등학교 동창회 회장을 불러모은 뒤 ‘고질적인 선거부정을 우리 대에서 뿌리뽑기 위해 선거정화위원회를 구성하자자’고 간절히 호소했다.
그랬더니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나의 호소를 받아 들여, ‘서울공대 선거정화위원회 구성’을 찬성했다. 정화위원회를 구성한 뒤 우리는 우선 ‘돈안쓰는 선거’, ‘표와 직책을 교환하는 행위’ 등을 일체 하지 않기로 결의를 했다. 그런 다음 양쪽 후보자들에게 선거정화위원회에 3천원씩 공탁금을 걸도록 했다.
그러나 두 후보자들은 선거정화위원회의 이런 방침에 콧방귀를 뀌면서 공탁금을 걸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선거정화위원회 활동을 신선하게 바라보던 학교의 분위기가 돌변해 버렸다. ‘지네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선거정화네 뭐네 하면서 설치느냐’는 식의 비아냥거리는 분위기가 퍼져 버린 것이다. 결국 나혼자 고고한 척 하면서 바보짓을 한 셈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는 한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다가 비장한 각오로 서울공대 기독학생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평소에 안면이 있는 기독학생회 간부들에게 본관 게시판과 기숙사 게시판에 방을 좀 붙여 달라고 요청을 했다.
방의 내용은 ‘서울공대 기독학생회 회원 40명은 선거정화대책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어느 후보든지 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위반할 경우 반대 편에 몰표를 던지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40명이 한쪽에 몰표를 던진다는 것은 후보의 당락을 결정짓는 엄청난 힘을 가진 것이었다. 그 당시 선거의 상황은 경기고와 경복고가 각각 후보를 냈었는데, 경복고 출신 후보는 돈을 쌓아 놓고 선거운동을 했고, 경기고 출신은 돈이 없었다.
사실 나는 서울고 출신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편을 가르자면 경복고 편을 들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돈을 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던 경북고 후보’보다 경기고 후보를 더 지지하고 있었다.
기독학생회가 그런 방을 붙이고 나자 양쪽 후보자들이 다음 날 공탁금을 냈다. 그리고 선거 분위기도 확 달라 졌다.
서로 상대방의 부정선거를 적발하느라 눈을 부라린 탓에 돈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경북고 후보는 돈을 쌓아 두고도 한푼도 써보지 못했고, 경기고 후보가 압승을 거두고 말았다.
이 선거 이후 서울공대에는 공명선거의 분위기가 완전히 뿌리내리게 된다. 내가 4학년에 올라가던 이듬해 선거에서도 선거정화위원회가 만들어지긴 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 게 별로 없었다. 어느 후보도 부정선거, 금권선거를 꿈꿀 수조차 없는 학교 분위기가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이때의 경험을 지금까지도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은 이 경험이 내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경험은 나의 앞날을 결정지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학문적 관심, 지적인 호기심으로 사회주의에 대해 공부하지만, 사회운동에 자신의 몸을 던지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아무런 전망도 없는 미지의 세계에 자신을 던질 수 있기 위해서는 작은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불의와 부정, 잘못된 것과 싸워서 승리한 경험’을 가져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서울공대 선거정화위원회의 경험을 통해서 이런 승리의 경험을 맞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경험은 훗날 내가 아무런 보장 없이 신념과 정의감만으로 과감하게 사회운동에 뛰어 들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
때문에 나는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한다.
‘사회과학 공부도 중요하고 역사에 대한 인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서 뭔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 보는, 승리의 경험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을 바꾸어 주는 중요한 체험이다’
그뒤 나는 학생운동의 불모지대인 서울공대에 진보운동의 싹을 심고 말겠다는 결심을 한 뒤 실제로 산업사회연구회라는 서울공대 최초의 학생써클을 만드는 데도 성공한다.
그 당시 나는 학내 데모가 있을 때면 현장에 나가 앞에 나와 선동하는 학생들을 유심히 봐두곤 했다. 그리고는 데모가 끝난 뒤 눈여겨 봐두었던 후배를 찾아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그가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선동을 했는지 민중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있는지, 이것 저것 관찰을 하곤 했다.
말하자면 공대 후배들 가운데 운동권 후배로 키워 볼만한 재목을 찾아내는 일을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4학년이 될 때쯤 해서는 공대 안에 산업사회연구회라는 학생운동 써클을 만들 수 있었다. 당시 이 써클에 참여한 사람은 신철영(전경실련 조직국장), 유재현(경실련 현 사무총장), 윤조덕(산업안전학 박사), 조중래(교수) 등이다. 사실상 서울공대학생운동의 효시를 이룬 멤버들이다.
이런 활동 덕분에 나는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한 공대생임에도 불구하고 그 뒤서울공대 민주동문회의 초대회장을 맡기도 했다. 서울공대 학생운동의 원조임을 인정받은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아! 전태일
60년대에 학생운동을 한 사람치고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목이 메어 불러보지 않았던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80년대 운동권의 죄책감의 근원이 광주사태였다면 60년대는 전태일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내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학교 4학년 가을 어느 날 갑자기 원정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영래 선배가 나를 급하게 찾는다’는 것이었다.
원정연은 새문안교회에서 내가 의식화를 시켰던 후배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법대 사회법학회(동숭학회의 후신) 써클에 속해 있었다.
서둘러서 가보니 조영래 선배가 그자리에 나와 있었다. 조영래 선배는 나를 보자 아무 말 없이 동아일보에 난 전태일군의 일기를 요약한 기사를 꺼내서 보여 주었다.
일기를 보자 활칵 눈물이 쏟아 졌다. 일기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마치 송곳처럼 내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조영래선배를 돕기 시작했다. 처음 계획으로는 서울법대 교정에서 전태일 추모식을 가지려고 했는데, 결국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모든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임종률선배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최고 지도부는 조영래선배가 맡고 학생운동 쪽은 장기표선배, 기독학생운동 쪽은 내가 맡아 추모식을 준비했는데, 정부의 탄압으로 운동이 성공적으로 결행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산된 뒤 낙심한 마음으로 조영래선배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새문안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갑자기 내 머리에 새문안교회에서 일을 벌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조영래선배에게 택시에서 내리자고 하여 다방에 가서 나의 생각을 말했더니 조선배도 그 구상을 적극 찬성해주었다.
그 당시엔 교회에서 데모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나는 은밀하게 농성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박세일(그 당시 산업은행에 근무)을 불러서 “오늘 밤 모든 준비를 해야 하니 아지트를 좀 마련해달라”고 부탁하고, 새문안교회에 가서 대학생회 회원들을 10여명쯤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세일이가 마련해둔 서울법대 선배의 집에 가서 농성준비를 했다. 뒤에 알고 보니 그때 우리가 밤새워 전단과 프랭카드를 만들었던 그 아지트는 다름 아닌 정성철변호사(경실련 전 상임집행위원장, 민자당 강남을지구당 위원장)의 집이었다.
훗날 경실련 활동을 시작하면서 나는 정성철변호사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만나보니 그 옛날 우리가 밤새워 농성준비를 했던 그 아지트의 주인이었다. 우리의 불행했던 현대사를 떠올려보면 우연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그 집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농성준비를 한 뒤 세수도 변변히 못한 채 다음날 아침 교회에 갔다.
전날 밤 이미 김종렬 목사님께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귀띔해 드리고 목사님은 뒤로 빠지시라’고 말씀드렸건만 목사님은 그자리에 남아 대학생 예배 설교를 비장한 어조로 하셔서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셨다.
예배 후 나는 대학생 전체를 모아놓고 선동을 시작했다.
“나는 새문안교회 세례교인입니다. 그런데 나는 전태일같은 노동자가 분신을 하는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는 도저히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정말로 새문안교회 세례교인답게 살아 가기 위해서는 행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 행동으로 인해 앞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나와 함께 농성의 대열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격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 났다.
그당시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에는 서울 상대에 다니는 박현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말하자면 교회안에서 대학생회를 의식화시키고 있던 나의 지도노선에 가장 반기를 들던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와 마이크를 쥐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친구가 의외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까지 새문안교회에서 가장 말썽꾸러기였다. 가장 말썽꾸러기인 내가 이 농성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보다 훌륭한 다른 모든 분들은 기꺼이 이 집회에 참여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그러고 나니까 사실상 선동이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곳에 있던 1백20명의 예배참석자 중에서 대학생회 활동을 하지 않던 40여명만이 돌아가고 80명이 농성에 참여했다. 우리는 새문안교회 교육관 4층으로 올라가 4층 예배실을 점거하고는 4층으로 올라오는 모든 층계를 책상으로 막아 버렸다.
그리고 교회 건물 바깥에 ‘참여와 호소의 금식기도회’란 제목의 플랭카드를 내걸고 농성에 들어 갔다. 광화문 거리를 향해 스피커를 들이대고는 전태일분신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시민들의 각성을 호소하는 방송도 했다.
당연히 교회가 발칵 뒤집어 졌고, 결국 다음 날 농성을 풀고 나는 종로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 나왔다. 이 사건은 그후 사회에 널리 알려 졌고 지금까지도 기독학생운동의 효시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나도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학생운동의 명실상부한 지도부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실제로 그뒤부터 나는 새문안교회 학생들을 데리고 KSCF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활동에서 나아가, 다른 교회의 기독학생들까지도 포괄하는 기독학생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사건은 내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처음으로 많은 사람 앞에 나서서 선동을 하는 경험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 옛날 내가 일기장에 썼던 결심을 실천에 옮긴 것이기도 했다.
통혁당 사건으로 수사를 받고 나온 뒤 나는 비굴했던 내 모습에 수치심을 느끼면서 일기장에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희생하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 지금 나를 괴롭히는 마음의 빚을 갚고야 말겠다’고 썼던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전태일 추모기도회는 그 옛날의 마음의 빚을 갚는 계기가 된 것이다.
71년 대통령선거와 십자가 데모
71년초 우리사회는 3선개헌을 강행한 박정희대통령과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대통령선거의 열기로 한껏 달떠 있었다. 당연히 학생운동 진영에서도 선거참가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나는 71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으나, 엔지니어의 삶을 일찌감치 포기한 탓에 졸업은 하는 둥 마는 둥 여기고 선거참관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 당시 학생운동의 최고 지도부의 역할은 조영래 선배가 맡았고, 그 다음 학생운동 쪽에서 중요한 역할은 장기표선배가 맡았으며, 기독학생운동쪽의 책임은 내가 맡았다. 그외에 일선에서 현장을 지휘하는 역할은 김근태, 이신범, 신재권 같은 이들이 맡았다.
당시 선거참여를 위해 어른들을 중심으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만들어졌고 그 아래 학생조직으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총연맹과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기독교학생운동조직인 기독청년협의회의 지도는 내가 하고 있었다.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에는 기독학생회총연맹, 교회청년연합회, 전국신학생연합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이 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으로는 기장 한국신학교 쪽에서 추요한목사, 황주석총무, 예장쪽에서 인명진목사, 홍길복목사, 임신영목사, 조성기목사, 감리교쪽에서 김동완목사, 김홍기목사, 정명기목사 등이 있다.
이밖에 교회청년연합회에서 이광일목사, 기독학생총연맹에서 나상기(통일시대 국민회의) 등이 함께 동참했다.
그 당시 선거참관운동은 선거참관인단을 만들어서 선거 당일 개표 부정을 막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각 단체에 가해지는 박정권의 탄압이 극에 달했고, 결국 자칫 종교탄압의 빌미를 제공할 우려가 있는 기독청년협의회를 제외하고는 모든 단체가 탄압으로 조직이 마비되다시피 되어 버렸다.
때문에 선거참관인단의 조직과 파견을 내가 책임을 맡고 있는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에서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측에서 대략 4천3백명 정도의 참관인단을 전국으로 보냈다.
그 당시 외부에는 비밀에 부쳤지만,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사무실이 바로 기독청년협의회의 사무실이었다. 따라서 목사님과 장로님들도 모르는 가운데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사무실을 통해 수천명의 선거참관인단이 전국에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박정희후보가 1백만표차로 승리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우리는 그때 개표과정에서의 부정을 막기 위해 개표 당일 개표하는 장소에 대규모의 야당참관인단을 보냈는데, 실제로 부정은 선거인명부 조작에서 저질러졌다.
따라서 선거가 끝난 뒤에도 선거부정을 고발하는 집회가 계속 열렸다. 기독학생협의회에서도 그 당시 선거부정을 고발하는 집회를 갖고 십자가데모를 강행했다.
데모가 있기 전 날밤 10여명이 빙 둘러앉아 행사를 준비했는데, 각자가 맡아야할 역할분담까지 하고 나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당시 십자가를 만드는 일은 서울법대생이었던 박동현(현재 장로교신학교 교수)이 맡고, 현장에서 진두지휘하는 임무는 기장의 성해용목사, 김동완목사(NCC총무)가 ,나는 배후조종을 맡았다.
모두가 자기가 해야할 일을 되새기면서 비장한 각오를 다졌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솟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 모두 기도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자리에서 불을 끄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다.
그때 나는 ‘내일의 시위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날의 기도 경험은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종교적 체험이었다. 말하자면 그날 나는 처음으로 종교와 운동이 하나로 만나는 경험을 했다.
‘두려움 없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힘과 확신을 얻는 것, 이것이 진정한 종교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의 기도 덕분에 훨씬 두려움 없이 십자가 데모에 임할 수 있었다.
별명이 된 ‘대학가 동향’
71년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몇달 지나지 않아 우리집에서는 해군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는 나를 환송하기 위한 모처럼의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조영래, 장기표, 이신범, 김근태, 심재권 등 학생운동을 함께 하던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그자리에서 우리는 농담처럼 이신범씨는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것이 좋겠고 하는 식의 말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내가 군대에 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조영래,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등이 모두 ‘내란예비음모죄’인가 하는 죄목으로 잡혀가고 말았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무수히 만났지만, 다같이 만난 자리는 환송연 때밖에 없었으므로 만난 횟수를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을 환송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진술하였고 그러다 보니 그 자리가 갑자기 중요한 자리가 되어 버렸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평소 같았으면 그들과 함께 감옥에 갇혔어야 하는데, 그들이 군인의 신분인 나를 보호해주느라 애써준 덕에 가까스로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입대한 지 한 동안은 나도 언제 잡혀갈 지 모른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냈다.
그 당시 대학가에서는 교련교육 반대라는 새로운 이슈를 내걸고 5.25 총선을 전후해서 치열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자 박정권은 71년 10월 15일 서울 지역에 위수령을 내리고 주요대학에 휴교령을 내린 뒤 학생운동 지도부들을 속속 잡아 들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해군장교로 입대한 뒤에도 나의 관심은 대학가 동향에 쏠려 있었다. 어찌나 대학가 동향에 관심이 깊었던지 군대 안에서 내 별명이 ‘대학가 동향’이 되고 말았다.
특교대에서 훈련을 받을 당시엔 바깥 세상의 뉴스를 들을 수 있는 길이 휴식 시간 중에 훈련을 맡은 소대장에게 물어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때문에 학생운동하던 동료들 가운데 누가 잡혀가고 누가 무슨 일을 하는지가 너무나 궁금했던 나는 틈만 나면 소대장에게 ‘대학가의 동향은 어떻습니까?’하고 물어 봤다.
내가 얼마나 소대장에게 자주 질문을 했던지 얼마 지난 뒤부터는 아예 동료들은 나를 “어이, ‘대학가 동향’”하고 불렀다.
교련반대 데모 이후 대부분의 학생운동가들이 제적당하거나 군대에 끌려가 지도부의 공백상태를 맞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훈련병 시절을 마친 뒤부터는 해군장교의 신분이지만, 기독학생운동을 지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나와 함께 기독학생운동을 했던 후배들로는 나상기, 황인성, 정명기, 서창석, 이광일, 성해용 등이 있었는데, 나는 진해에서 이들을 배후지도하면서 기독학생운동을 이끌었다.
기계과를 졸업한 덕에 나는 진해 시설창에 근무했는데, 2주일에 한번씩은 반드시 서울로 올라 갔다.
진해에서 토요일 낮 12시에 기차를 타고 삼량진에 가서 경부선을 타면 밤 11시께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러면 다음날 밤 11시까지 적어도 6~7명의 후배들을 만나고, 또 다시 밤기차를 타고 삼량진에 내려와 역전 식당에서 잠시 눈을 부친 뒤 진해행 기차를 타고 돌아와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했다.
해군중위가 밤기차를 타고 서울과 진해를 오르내리면서 운동권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동분서주하는 일은 매우 고달픈 일이어서 한번 서울을 다녀오면 다시는 안가겠다고 했다가도 두 주후에는 또 다시 서울을 올라가곤 했다.
한편으로 해군 장교 시절 나는 절친한 친구 한명을 사귀게 된다. 당시 해군장교 가운데는 나말고도 운동권 출신으로 이각범(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있었다. 훈련병 시절 각범이나 나나 서로 ‘운동권 출신이 누가 있나’하고 찾다가 서로를 발견하고서는 의기투합해서 함께 생활을 같이 했다.
이각범이는 그 당시 배를 탔고 나는 시설장교로 육상근무를 했는데, 각범이는 배를 탔던 까닭에 근무수당이 나와서 나보다 월급 액수가 많았다. 우리 두 사람은 월급을 받아서 생활비를 같이 쓰기로 했는데, 나는 두 주일에 한번씩 서울을 오르내리다 보니 늘 돈이 부족했고 각범이는 사흘에 한번씩 배에서 보초를 서야하는 탓에 돈쓸 시간이 없어 늘 돈이 남았다.
때문에 내가 쓰는 용돈의 액수가 각범이보다 항상 두배 정도 많았으나, 각범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집에 손을 벌리지 않고도 진해 서울을 오가며 기독학생운동을 뒤에서 지도할 수 있었다.
각범이와 나는 그 뒤에도 절친한 친구가 되어서 훗날 경실련도 함께 만들게 된다.
한해 뒤 나는 서울 해군본부로 올라와 서울 근무를 하게 되는데, 그때 나는 문화촌 집에서 나와 독신 장교 숙소에서 지냈다. 대방동 해군본부 집까지 출퇴근하는 것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다섯시에 퇴근하면 곧 바로 숙소에 가서 사복으로 갈아 입은 뒤 퇴근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후배들을 만나고 밤늦게 숙소로 돌아와 아침에 출근하는 생활을 계속 했다.
그러나 해군장교의 신분과 기독학생운동의 실질적 리더역할을 동시에 해나가던 이중 생활은 내가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면서 하루 아침에 막을 내리게 된다.
민청학련 사건과 이등병 강등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정권의 유신조치가 내려진지 1년여만인 1973년 10월 2일, 서울 문리대생 2백50여명이 교내 4.19 기념탑 앞에 모여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체제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뒤 시위를 벌였다.
박정권의 폭압적인 긴급조치에 눌려 사회 전체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을 때 학생들이 처음으로 ‘유신체제 비판 불허’라는 금기를 깨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시위는 기독학생운동 후배인 황인성을 포함해 나병식, 강영원 등이 주동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2월 24일 함석헌, 장준하, 천관우, 계훈제, 백기완 등 각계의 민주인사들이 서울 YMCA에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유신헌법철폐를 위한 개헌청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해가 바뀌어 1974년이 되어서도 유신헌법의 철폐와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의 소리는 더욱 거세게 확산되었고, 대학가의 시위도 갈수록 거세어져 갔다.
그러자 박정권에서는 74년 1월 8일 마침내 긴급조치 제1,2호를 내렸고, 그 때부터 10.26사건으로 박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5년 11개월 동안 무시무시한 긴급조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나는 그 당시 진해 시절을 마치고 서울 해군본부에 올라와 있었는데, 사회분위기가 그랬던 만큼 군복을 입은 상태에서도 기독학생들의 반유신운동을 은밀하게 지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1974년 4월 25일, 나에게 첫 구속의 시련을 안겨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민청학련)사건이 터지게 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의 배후 주동인물로 *전 인혁당수 도예종과 여정남 등의 불순세력 *재일조총련 비밀조직의 강원인 곽동의와 곽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등 일본인 2명 *기독교학생총연맹(KSCF) 간부진 *이철·유인태 등 주모급 학생운동자와 유근일 등을 꼽았다. 내가 사실상 배후지도를 맡았던 KSCF도 민청학련 주동단체에 포함된 것이다.
기독학생운동권이 이처럼 핵심 지도부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71년 위수령사건으로 학생운동 지도부가 대거 구속됨에 따라 당시 학내 운동권은 거의 괴멸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때문에 그 뒤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교회로 운동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는데, 교회의 경우 ‘종교탄압’ 시비를 우려해 비교적 탄압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새문안교회와 제일교회가 학생운동의 기지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두 그룹이 있다면 하나는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한 학내운동권이었고, 또 하나는 KSCF로 대표되는 기독학생운동권이었다. 그리고 나는 KSCF를 배후에서 지도하고 있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자들이 감옥에 가고난 뒤 KSCF쪽에서 유신반대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는데, 나상기, 이광일, 황인성, 서창석, 정명기 등이 주동이었고 내가 뒤에서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당시 KSCF 회장은 동생 서창석이 맡고 있었는데, 이런 배후에도 내 도움을 받기가 용이할 것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물론 KSCF 회장이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제적되고 구속되는 게 관례여서 회장을 맡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도 이유였다.
결국 민청학련이 터진 뒤 KSCF의 지도부였던 이들은 모두 다 구속되었다. 황인성이 무기를 선고받았고, 동생 서창석을 비롯해 나상기, 이광일이 20년형을, 정명기가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KSCF후배들을 지도하는 것 이외에 유신반대운동을 펼치던 재야단체와 문리대 학생운동권과도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주로 국제관계와 재정문제, 그리고 기독운동권과의 연결이었다.
우선 나는 일본에 가 있던 김용복박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외국의 정보를 학생운동권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내가 유신반대운동에 대한 자료를 일본의 김용복박사에게 보내면 그것이 일본에서 보도되고, 이어서 미국의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에도 보도되곤 했다.
그리고 외국에서 국내 운동권에 들어오는 각종 정보의 창구역할도 맡았다. 예컨대 한일각료회담 반대운동을 할 때 일본에서 관련 정보를 보내 주면 내가 이것을 민청학련 지도부에 전달하고 그것을 참고해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서중석(성균관대 역사학과 교수)은 나와 문리대 학생운동권을 연결해주던 고리였다. 서중석이 문리대 쪽에서 자금이 필요하다고 연락하면 김관석 NCC총무에게 부탁해 돈을 구해서 가져다주곤 했다. 말하자면 민청학련사건 지도부에 자금을 대준 셈인데, 다행히 이 연락선은 수사과정에서 발각되지 않았다.
서중석이 끝까지 비밀을 지켜주었기 때문인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물론 NCC총무인 김관석목사까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질 뻔했다.
그 당시 박형규 목사와 지학순 주교 등 종교지도자들이 모두 민청학련 사건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유독 김관석목사만이 무사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화를 모면한 김관석목사는 그 뒤 민청학련사건 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또한 동생이 군인의 신분인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서울과 진해를 오가며 KSCF를 지도했던 일을 모두 자기가 한 일처럼 뒤집어 써준 덕에 나는 한동안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나는 결국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로 구속된다.
74년 4월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고 이철, 유인태, 나병식, 김병곤 등이 민청학련사건 주모자로 줄줄이 잡혀갈 당시 나는 KSCF후배인 황인성의 도피를 도와주었다.
평소 잘 알던 린다 존스라는 선교사의 집에 숨겨주었는데, 선교사가 중앙정보부 직원의 거짓말에 속아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만 인성이가 잡혀가는 일이 일어 났다. 물론 내가 도피를 도왔다는 사실도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나는 이 사실을 황인성이 잡혀간 직후 린다 존스 선교사에게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제대를 3개월 남겨둔 해군중위의 신분이었던 까닭에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곧 잡혀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도피할 수가 없었다.
중앙정보부에 잡혀가기 하루 전날 밤 나는 사랑을 한창 키워가고 있던 지금의 아내 신혜수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전쟁터로 떠나는 연인들이 애태우며 함께 보낸 밤이라고 해도 어찌 이보다 더 간절하고 안타까왔을까.
나는 스무네살 고운 아가씨였던 신혜수에게 말했다.
“오늘 밤 헤어지면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0년 뒤에 만나도 우리 이런 마음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신혜수는 참 의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는 걸요, 뭐. 열심히 면회갈 테니 힘내요”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또 다시 남산의 붉은 건물 안으로 끌려 갔고, 그 뒤 20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나보다 먼저 구속된 동생 서창석도 20년형을 선고받았으니 형제가 합쳐서 40년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수배자를 숨겨줬다는 사실과 민청학련 주모자들과 몇차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 드러났음에도 2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그 당시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드러났다면 더 중형이 선고되었을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나는 해군 중위로 제대할 날을 3개월을 앞둔 시점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당하고 기약할 수 없는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다시 하느님에게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이끌려 붉은 건물 지하실에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 왔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에 둘려 쌓여 정신 없이 맞고나자 소지품을 전부 다 꺼내 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헌혈 증서가 나왔다.
“이게 뭐야?”
“헌혈증섭니다. 오늘 낮에 교회에서 헌혈을 했습니다”
“어디 봐”
나는 아직도 주사자국이 선명한 오른 팔을 보여 주었다.
그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더 이상의 몽둥이 찜질을 중단시켰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정치범들의 첫 수사 때면 으례 행해지는 ‘죽지 않을만큼의 몰매’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넘겼다. 이 헌혈증서가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약간 거짓말을 보태어서 얼굴이 두배로 부풀어 오른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공포의 중앙정보부에 정면으로 걸려든 것이었다.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만지면서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맞아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무엇인가 또 새로운 것이 터졌나? 제발 조사가 없었으면’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이렇게 며칠간 수사를 받고 나는 육군본부 영창으로 옮겨갔다.
군 영창에서 보낸 나의 첫 감옥생활도 참 힘들었던 시기였다.
나는 감옥에 갇혀 바깥 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이 세상이 결국 전부 감옥 아니냐, 안에 있으나 바깥에 있으나 구속과 죄악 속에서 사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감옥안에서 오히려 정신적인 자유를 느낄 수 있다’라고 달고나한 듯 글을 썼다.
또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살아갈 것’이라며 담대하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면 실제로 나는 이런 겉모습과는 달리 감옥에 갇히면 하루도 넘기지 못하고 하느님께 “빨리 석방시켜달라”고 기도드리곤 했다.
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밤마다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운동장을 뛰어 다니기도 하고, 새문안교회에서 낯익은 사람들과 예배를 보고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눈을 뜨는 순간 내 눈앞에는 굳게 닫힌 시커먼 철창이 보였고, 내게 허용된 공간은 뜀박질 한번 하기도 어려운 사방이 꽉 막힌 독방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너무나 절망스러웠고, 나는 그때마다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여기서 나가게 해주십시오”
날이 밝으면 언제 불려갈 지 몰라 초초와 불안에 떨었다. 간수에게 불려나가지 않고 날이 저물면 ‘아, 오늘은 안 불렀구나’하고 안도의 숨을 쉬고, 내 수번이 불리면 ‘오늘은 또 얼마나 당하게 되는 걸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한가지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벌한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운동에 나설 수 있었던 진정한 힘은 민중해방이라든지 인권이라든지 자유라든지 하는 것들이 아니었다. 나를 고통 속에서 지켜 주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에게 받았던 신앙교육,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에서 만났던 하느님, 그리고 그 하느님께 드렸던 간절한 기도와 그런 영적인 만남 속에서 경험한 뜨거운 감격과 격려, 위로, 용기 등이었다.
군영창에서 했던 예배와 설교 경험도 내겐 신선한 체험이었다. 나는 군영창에 있으면서 한주일에 두세차례씩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군사병들 앞에서 자주 설교를 하곤 했다.
대부분이 탈영병이었고 그 가운데는 사형수나 무기수도 있었는데, 그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는 학생운동가였던 내겐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바깥에 있을 때 내 설교의 주제는 주로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역사와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그런 설교가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근무이탈을 해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는 탈영병,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형수와 무기수, 이들에게 필요한 기도가 무엇이었겠는가.
나는 그때 이렇게 설교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당신과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받고 좌절하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훨씬 더 사랑하십니다.”
서울구치소로 옮겨간 뒤부터는 예배를 볼 수가 없었다. 긴급조치위반자들만 예배당에 못가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양교도소로 옮겨간 뒤에는 일요일 아침이면 서로 통방을 하면서 예배를 봤다. 안양교도소는 이층에 작은 독방이 죽 이어져 있고 여기에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각각 한명씩 들어 있어서 통방을 하기가 좋았다.
일요일이면 우리는 굳게 닫친 철창을 붙잡고 바깥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렸다. 아래 층에 있던 김형기(목사)가 금관의 예수를 구성지게 부르면 하느님에 대한 간절함과 가슴 벅찬 감동으로 모두 목이 메었다.
다닥다닥 붙은 닭장같은 독방의 철창문을 부여잡고 우리는 ‘얼어붙은 저하늘과 저 땅’에 금관의 예수가 온 것처럼 우리의 철창 안에도 예수님이 오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나는 그때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나가 예배를 보는 것이 얼마나 큰 하느님의 은총인가를 처음으로 깨달았다.
전나무 같은 여자, 신혜수
나의 첫 수감생활을 말하려면 먼저 나의 아내 신혜수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그만큼 민청학련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내게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이 바로 아내, 신혜수였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때는 진해에서 올라와 서울의 해군본부에 근무할 때였다. 나는 그당시 해군장교로 있으면서 ‘걸림돌’이라는 모임 하나를 만들었다. 기독교운동을 앞에서 이끌던 청년들의 모임이었는데,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다.
김동완(NCC총무), 권호경(CBC사장), 인명진(갈릴리교회 목사), 이창식(YMCA활동), 김성재(한신대 교수), 이미경(여성단체연합 대표), 신필균(크리스챤아카데미 사회교육원 실무자) 등이 걸림돌 멤버로 참여했는데, 모임을 꾸리려다 보니 여성회원이 좀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옥경(조영래변호사 부인)씨에게 걸림돌에서 활동할만한 여성회원을 몇명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때 소개받은 사람이 바로 신혜수였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나는 신혜수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혜수가 내게 몇가지 따끔한 충고의 말을 했다. 자기가 보기엔 모임을 잘 꾸려보려는 내 의욕이 너무 앞서 다른 회원들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으며, 그것이 오히려 모임을 활성화시키는 데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었고, 논리정연하게 나를 설득하는 그의 모습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그 날의 대화가 아내와 나를 연인의 관계로 발전시키는 첫 계기가 되었던 것같다.
그때부터 나는 신혜수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게 되었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신혜수를 불러내서 만나곤 했다. 그리고 만난 지 6개월쯤 지난 73년 어느 날, 우리집 근처 다방으로 불러내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다.
“당신은 참 순수하고 담백한 여자다”고 말하고 아내의 손을 덥석잡으며 ‘당신을 좋아 한다’고 고백했던 것같다.
지금도 내 고백을 듣고 놀라던 아내의 눈이 기억에 남아 있다. 여하튼 그날의 고백이 있은 뒤부터 우리의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아내를 만날 즈음은 내가 평생을 혁명가로 살아가리라고 결심하고 있던 때였다. 때문에 그 당시 내가 바라던 여성상은 나와 혁명의 길을 함께 가줄 동지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는 여학생이 아주 드물었던 그 당시만 해도 이처럼 ‘의식 있는’ 여성을 만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나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하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생길이 훤한 나같은 운동권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여자가 있을 것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은 비단 나만이 아니라 그 당시 학생운동권에 몸담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러했다. 우리보다 윗 세대 선배들의 경우에는 본인은 학생운동에 몸담았지만, 부인은 사회운동과 전혀 인연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독립운동에 나서는 남편을 삸바느질을 하면서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이 우리 윗 세대 운동권 선배들의 부부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세대부터 소위 말하는 운동권 부부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운동권의 지도그룹이었던 서울대 운동권과 이화여대 진보서클인 ‘새얼’ 회원들 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새얼모임은 대부분 이효재(여성민우회 고문)선생의 제자들로 구성된 여자들만의 모임으로 이화여대 운동권 서클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서울대 운동권과 결혼한 이대 새얼모임의 회원 가운데 알만한 사람만도 이옥경(고 조영래변호사 부인), 신혜수(서경석 부인), 조무하(장기표씨 부인), 이미경(이창식씨 부인), 최영희(장명국석탑노동연구원원장 부인), 장하진(충남대 교수, 김홍명 조선대교수 부인), 김은혜 (신철영씨 부인),인재근 (김근태씨 부인), 오성숙(참교육학부모회 회장, 김세균 서울대교수 부인) 등이 있다.
아내와 나도 서울대 운동권과 이대 새얼모임 커플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우리는 아주 뜨겁게 연애를 했다. 정신 없이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만났고, 서로가 자주 만나기를 원했다. 아내를 만날 당시 나는 해군 중위 신분이었던 까닭에 데이트라고 해봐야 빡빡하게 잡힌 약속 사이에 잠시 빈시간을 이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단체 사람들이나 후배들과의 약속이라는 것이 갑자기 생기거나 예상보다 길어지는 때가 많아서 아내 혼자 다방에 앉아서 몇시간씩 나를 기다리는 경우도 아주 많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는 참 무던히도 잘 참아 주었다.
어느 날엔가 두시간 쯤 늦은 나를 기다리던 아내가 이렇게 물었다.
‘경석씨는 왜 그렇게 머리를 안 감아요?’
‘근지럽긴 한데, 도무지 목욕할 시간이 없어’
이렇게 말하고 나서 거울을 봤더니 머리에 기름이 반지르르하게 도는 게 내가 봐도 굉장히 꾀죄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아내는 그날 이후로 한번도 나의 그런 모습에 대해서 뭐라고 말한 적이 없다.
아마도 내가 평범한 다른 여자와 연애를 했다면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20년형을 받았을 때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결혼하기로 약속한 남편감이 구속되어 20년형을 받았는데도 흔들림 없이 헌신적으로 옥바라지를 해주었다.
나는 이런 아내를 보면서 자주 전나무를 연상하곤 한다. 비틀림 없이 곧게 뻗어나가는 전나무의 곧고 강한 모습처럼 아내는 의지가 무척 강하고 굉장히 원칙적이다.
감옥에서 나온 뒤 어머니께서 내게 이런 말을 하시며 감탄하신 적이 있다.
“혜수, 참 대단하더라. ‘경석이가 20년형을 받았다’고 말하니까, 웃으면서 ‘조금 살다가 나올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어디 경석씨만 잡혀갔고, 20년형을 받았나요’라고 말하더구나”
아내는 이런 모습으로 세번에 걸친 나의 구속을 의연하게 뒷바라지 해주었다.
내복 솔기에 넣어서 교환한 연애편지
감옥에 갇힌다는 것이 좋을 리 없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감옥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몇가지 추억을 만들어준 곳이기도 하다.
아내와 연애편지를 내복 귀퉁이에 숨겨서 주고 받았던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다.
지금은 시국사범들에게도 매일 한차례 면회를 허용하고 있지만, 그때는 긴급조치위반자의 경우 가족면회도 불가능했고 편지 왕래도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 당시 정치범들 사이에서는 내복 귀퉁이 솔기를 이용해 비밀편지를 교환하는 것이 알려진 비밀이었다. 감방 안에서 쓰는 누런 화장지에 어렵게 구한 볼펜으로 빽빽하게 편지를 써서 겨울 내복 밑단이나 팬티의 오줌 구멍 밑단을 뜯어 넣고 다시 바늘로 꿰매어 밖으로 내보내는 식이었다.
나와 아내도 이 방법을 이용해 연애편지도 교환하고 새문안교회 후배나 KSCF후배들에게 긴급하게 지시해야할 이야기도 전했다. 이 가운데 세번째 내보낸 메모는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데, 지금 봐도 가슴이 뭉클하다.
10개월만에 처음으로 아내를 특별면회로 잠시 만나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쓴 것인데,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당신을 접견한 후 며칠 간 당신의 영상이 사라지질 않더니 꿈도 계속 꾸었소. 오랫만에 본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왔던지 모르겠소. 요즈음에 와서 더욱더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존재인가를 절실하게 느끼오. 당신은 나를 위해 할 일이 많고 베풀 일이 많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베풀일이 없구려.
내가 언제나 다시 당신의 손의 감촉을 느낄 수 있게 될까? 그러나 나는 지금 이순간에도 당신을 만나고 있소.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한 것같소.
---- 아무리 오래 떨어져 있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나와 지금같이 하고 있고 때문에 나는 지금 살아갈 수가 있는 것같소.
철창을 부수고 당신에게 달려가고픈 심경을 억누른 것은 나의 당신에 대한 사랑을 보다 승화시키고 싶은 욕심도 그 한 이유가 될 지 모르겠소”
젊은 남자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애인이나 부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는 엄청나게 다르다. 특히 시국사범들은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고 나오는데, ‘책 뒷바라지’를 제대로 받으려면 애인이나 부인이 꼭 필요하다.
내 경우에도 3차례 감옥에 있을 동안 대학 신입생 이후부터 거의 읽을 수 없었던 철학서, 역사서를 비롯해 일어,영어 등 어학서적들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 뒷바라지를 한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특히 민청학련사건 때엔 결혼하기 전이었으니 부인이 아닌 애인의 신분이었다.
하지만 그때 아내는 내가 석방될 때까지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로 일주일에 세차례씩 꼬박꼬박 면회를 왔다. 사실 면회를 와봐야 나를 만나지도 못했으니 빨래와 책 뒷바라지를 위해 몇 시간 걸리는 교도소까지 찾아 온 셈이다.
아내는 나와 기독학생운동 후배들 사이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도 했다. 그 때의 메모를 보면 정인승, 원정연, 황주석 등 밖에 있던 후배들에게 이러저러한 말을 전달해달라는 나의 부탁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또 이런 당부의 말도 있다.
“요즈음 바깥운동 과정에 주어진 상황 속에서 당신도 열심히 참여하기 바라오”
그 와중에 나는 아내가 민주화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해주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참 욕심이 많았던 셈이다.
석방되기 두달 전쯤에는 안양교도소에 있던 정치범 13명이 합방을 했었다. 석방운동이 갈수록 거세어지고 구속자가족들의 목요기도회도 여론의 호응을 받으며 계속 열리자 박정권이 유화정책을 쓴 것이다.
그때 함께 지냈던 사람들은 김동길교수, 안재웅선생, 나, 김병곤(사망), 이원희, 나상기, 이광일 등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독방에서 혼자서 지내다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니 비록 감방이라고는 해도 너무나 좋았다. 우리는 함께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사회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꿈을 꾸기도 했다.
저녁 점호가 끝나고 나면 8시부터는 취침시간이었는데, 그러면 김동길교수가 서양세계사 강의를 했다. 김교수는 더러 낭랑한 목소리로 영시를 암송하기도 했다.
사방이 컴컴한 철창 안에서 서양의 역사와 영시 낭송을 들으며 나는 잠시 내가 바깥 세상에 나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75년 2월 우리는 대부분 석방되었다. 안양교도소를 나오는 날 부모님과 함께 아내도 나왔다.
나는 아내에게 뜨겁게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결국 여러 사람들의 눈 때문에 아내에게 키스를 하진 못했다. 아직도 그게 무척 아쉬운 기억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그때 내 심정이 어떠했는가가 지금도 느껴진다.
그리고 그해 가을인 75년 12월 7일 아내와 나는 장인어른의 극심한 반대를 딛고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YH사건과 고막터진 고은선생
75년 석방된 뒤 나는 KSCF간사와 김진홍목사의 활빈교회, NCC 간사, EYC 간사등 본격적인 기독운동을 하면서 몇 해 동안을 보냈다.
KSCF간사를 그만둔 뒤 나는 한동안 신학교에 들어갈 결심을 굳히고 광나루의 장로회신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통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의 방해로 결국 입학허가취소 통지를 받게 되었고, 신학교 진학이 한동안 좌절되고 말았다.
EYC(한국 기독청년협의회) 간사 시절도 참 열심히 일했던 때이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노회 청년연합회회장이었던 송진섭(현 안산시장)과 협력해서 각 교단 청년회전국연합회를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일을 했는데,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두 해 동안 EYC 간사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기독청년운동을 완전히 반정부 운동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때부터 EYC는 당시 민주화청년협의회(약칭 민청협)와 어깨를 견주는 재야청년운동의 핵심운동체로 부각되었다.
그리고 79년 어느 날 ,나는 이창복선생에게서 자신의 뒤를 이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약칭:사선) 총무를 맡아 달라는 제안을 받고, 활동의 장을 EYC에서 사선으로 옮긴다.
사선은 기독교와 가톨릭계 사회선교단체들의 협의체로, KSCF와 같은 학원선교단체, 산업선교단체, 가톨릭농민회 같은 농민단체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나는 사선 총무로 부임되자 마자 첫 사건으로 YH사건을 다루게 되었다.
당시 YH노조위원장이 최순영씨였는데, 그의 남편이 바로 나의 가까운 후배인 황주석(현재 YMCA활동)이었다. 황주석은 그당시 한신대를 다니다가 도중에 자퇴를 하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최순영씨와 사귀게 된 것이다. 그당시 이 두사람은 비밀결혼을 하고서 최씨가 임신을 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YH사건이 터진 것이다. YH사건은 60년대 호황을 누리던 국내 최대의 가발 수출업체인 YH무역이 70년대 들어 경기가 나빠지면서 경영난이 몰아닥치자 폐업을 선고하고 미국으로 가려다가 이를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사태로 번진 사건이다.
YH 노조는 산업선교회에 호소를 하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독자적으로 폐업반대운동을 펼쳤는데, 여의치 않자 마지막으로 나에게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그뒤 나는 YH노조를 돕기 시작해 많은 성직자들의 격려방문을 조직하고 대외홍보를 펼쳐주는 등으로 도왔으나 사태가 호전되지 않아 결국 노동자들의 기숙사 농성으로 사태가 악화되었다.
당시 비밀지원팀을 조직하였는데, 그 멤버는 나, 신대균(경실련 조직위원장을 지낸뒤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운영위원장), 이원희(새벗교회 목사), 이상희(울산 경실련 사무처장), 황주석 등 5명이었다.
한번은 우리 집에서 지원팀이 모여 YH 노조투쟁운동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주된 내용은 정부의 대응과 그에 따른 대책마련이었는데, 우리는 먼저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 추측을 해보았다.
아마도 경찰은 절단기로 철문을 뜯어 내고 농성장에 난입해서 주모자급 노동자들을 구속시키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강제로 퇴직금을 주어서 지방으로 내려보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날 새벽 본격적으로 농성장 진입을 시도할 것같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나는 그때 YH여동들 몰래 농성장을 빠져 나와 신민당사로 들어갈 것을 제안하였는데, 이유는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제 아무리 노동자들이 농성을 해도 신문에 기사 한줄 나지 않던 시대여서 여론을 불러 일으키려면 어찌되었건 언론에 보도가 나야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과 접목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들 내 의견에 동의해 우리는 노동자들을 안전하게 당사에 진입시키기 위해 노조원 2백명 가운데 60명은 농성장에 잔류하고 나머지는 3~4명씩 몰래 빠져나와 아침 9시에 신민당에 도착한다는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두고 그날의 토론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YH노조 농성장에 도착해보니 우리의 예상처럼 그날 새벽에 경찰들이 난입해 철문을 절단기로 부수려다가 노동자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을 갔고,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언제 그들이 또 다시 들이닥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상황이었다.
황주석이 좀전에 세운 계획을 설명하자 노조에서도 적극 찬성했고, 일부 노동자들만 남긴 채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신민당 근처로 가서 아침 9시가 되면 일제히 신민당사로 뛰어들어가기로 구체적 방침을 정했다.
그리고 난 뒤 나는 이원희, 이상희, 신대균을 동원해 민주화운동지도자들에게 알리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때 알린 사람들이 함세웅신부, 이재정신부, 고은시인, 문동환박사, 이문영교수, 한완상교수 등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여러 사정으로 오지 못하고 문동환박사, 이문영교수, 고은시인 등 세분이 그날 아침 기장 선교교육원으로 오셨다.
우리는 그분들에게 YH노조의 상황을 설명하고 노동자들이 무사히 신민당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신민당측과 협의를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잠시 상의를 하신 뒤 상도동으로 가서 김영삼총재에게 부탁해 YH 노동자들이 당사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실제로 아침 9시가 되어 신민당사로 가보니 사방에서 노동자들이 뛰어 나와 ‘와’하고 당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기쁨의 만세를 불렀다.
신이 난 우리는 이틀 동안 교계인사들의 격려방문과 물품지원을 조직화하는 일을 정신 없이 하다가 다음 날 밤 다시 지원팀이 우리집에 모였는데, 경찰들이 우리집에 들이닥쳐 나를 연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당시 우리가 한 행동이 그다지 법에 걸리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 다른 멤버들을 뒷담으로 도망치게 한 뒤 신민당사에 오신 세분 어른께 전화를 드렸더니 그쪽도 경찰이 들이닥쳐 실갱이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전화로 그분들께 “제가 전화로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오시라고”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그분들께 연락하러 갔던 이원희, 이상희, 신대균 등 후배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당시 사선총무였기 때문에 어차피 신분이 노출되어 구속사태가 벌어지면 1차 구속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비공식지원팀의 멤버들이어서 어른들과 말만 맞추면 구속을 피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처럼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말을 맞추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해 내가 전화로 그렇게 말씀을 드리니 어른들도 금방 내 속뜻을 알아 차리셨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은시인과는 결국 전화통화를 못해 말을 맞추지 못한 채 세분 어른들과 나는 각각 경찰서로 연행되고 말았다.
때문에 전후사정을 모르는 고은시인께서 자기를 찾아온 이상희를 보호하려고 계속 딴 말을 한 탓에 너무 많이 맞아서 결국엔 고막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고은시인은 그 뒤 감옥에서 나오고 난 뒤에도 고막터진 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셔서 나는 두고두고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문영교수와 문동환박사의 경우에도 어찌 보면 우리들의 부탁을 받고 김총재에게 부탁을 했던 것 뿐인데, 그것 때문에 구속되어 갖은 고초까지 겪게 되니 참 마음이 무거웠다. 게다가 인명진 목사의 경우 사선 실행위원이었는데, 내가 격려방문을 부탁해서 농성장에 한번 갔던 것 때문에 구속되었다. 물론 그 분들께서야 내게 불편한 마음을 전혀 갖지 않으셨지만, 나로서는 참 죄송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한창 조사를 받던 도중에 YH노동자인 ‘김경숙’양의 죽음 사실을 듣게 되었다. 한 기자가 YH사건관련 신문기사를 보여주는데, 큰 글씨로 김경숙양이 건물에서 떨어져 사망했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
나는 한편으로 모든 것이 내 책임인 것같아 안타까움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한 분노와 통한을 느껴야만 했다. 결국 YH사건은 김영삼총재의 제명과 부마사태, 10·26으로 이어졌고, 그해 12월 12일 재판사상 전례가 없는 10만원의 보석금을 내고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격려방문에 나섰던 인명진목사, 문동환박사, 이문영교수, 고은시인, 그리고 나는 YH인사로 여론에 소개되었다.
YH사건을 돌이켜 볼때마다 피가 끓는 것같은 분노를 지금도 느낀다. 꽃다운 젊은 여성노동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그 사건은 박정권 말기의 폭압적인 상황이 빚어낸 작품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사건을 통해 역사의 한 가운데에 서있는 경험을 한 셈인데, 그때 소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열심히 치밀하게 생각을 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최선의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날 밤 지원팀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거듭해 이끌어냈던 신민당사 농성이 결국 여론의 시선을 끌게 하였고 10·26을 거쳐 서울의 봄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다는 사실이 내게 이런 깨달음을 준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매사를 깊게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YH노동자들은 그 뒤 주동자들은 모두 구속되었고 나머지는 퇴직금을 받고 강제로 고향으로 보내져 모든 일이 우리가 예측한 대로 되고 말았다.
박사가 돼서 교수가 되시오,그러나 NCC총무는 하지 마시오
YH사건 이후는 불안한 ‘서울의 봄’ 시대였다. 3김 시대가 열리고 12·12 사태가 일어나서 언제 다시 군부가 집권을 하게 될 지 모르는 불안한 계엄령 시대가 계속 되었다.
한편으로는 복직국면이 열렸다. 정치인들이 복권되고 학생들도 대부분 복학이 되었다. 그런데 노동자만은 복직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나는 감옥에서 나온 뒤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복직운동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80년 4월 15일 광화문에서 가두캠페인을 하다가 동일방직 해고노동자인 정명자씨와 함께 계엄법 위반으로 또 다시 구속되고 만다. 민주화시대가 열린 것처럼 모두가 들떠 있던 시기에 노동자들의 복직캠페인을 벌였다고 덜컥 구속이 되자 참 허무했다.
이로써 나는 3번째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때의 구속은 뒤에 생각해보면 나로서는 행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내란음모 사건으로 내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이 갖은 고문을 당할 때 나는 이 사건으로 감옥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았기 때문이다.
구속되기 전인 서울의 봄 시절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가는 대표적인 조직으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등 세분이 공동대표를 맡고 20여명의 집행위원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청년대표로 나와 심재권, 조성우 세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때 운동진영의 최대의 이슈는 김대중씨와 김영삼씨가 어떻게 하면 하나로 합치느냐 하는 문제였고,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하는 재야인사들은 대부분 김대중씨를 중심으로 운동을 전개하던 시절이었다.
한완상교수, 문동환박사, 이문영교수 등도 김대중씨와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었는데, 그분들이 나에게 “앞으로 새로운 정치를 하는데 젊은 사람들도 많이 참여해야 한다”면서 “김대중씨와 함께 정치를 해보자”는 권유를 했다.
나는 정치를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정치활동을 모색하는 소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만 동일방직사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나는 정치권에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본의 아니게 그곳에서 몸을 빼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그 뒤에 일어나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이라는 대란(大亂)을 용케 피할 수 있었다.
나는 광주사태 소식을 감옥 안에서 처음 들었다.
5월 15인가에 문익환목사와 이문영교수, 예춘호 선생이 서울구치소로 특별면회를 와서는 들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이제는 민주화가 다 됐어”
그때는 데모가 워낙에 극심해서 구치소에까지 최루탄 냄새가 날 지경이었다.
때문에 나도 한껏 고무되어 편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는데, 며칠 뒤 담당간수가 눈물이 글썽글썽해가지고서는 “다 틀렸어. 광주에서 큰 일이 벌어졌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광주사태에 대한 소식을 대충 들려주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자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는 것같았다. 나는 66년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그때까지 14년 동안 낮밤을 가리지 않고 운동을 위해 뛰었었다. 한번도 운동을 쉰 적이 없었고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면 또 다시 운동을 했고 그러다가 또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민주화가 되리란 기대감에 한껏 고무되어 있다가 ‘광주사태’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자 완전히 정신적인 그로기상태에 빠져 버렸다. 운동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 나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것같은 무력한 상태로 빠뜨려 버렸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목사의 길이었다. 하지만 목회를 하는 평범한 목사가 아니라 문익환목사나 박형규목사처럼 인권운동을 하는 목사, 십자가를 앞세우고 정의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고 바치는 그런 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그해 7월 석방된 뒤 나는 운동을 쉬었다. 그 당시 후배들은 한창 반미운동을 할 때였는데, 나는 ‘지금은 도무지 아무 것도 못하겠다’고 말하고 무조건 쉬었다.
그리고 다음해 사선 총무를 그만두고 광나루의 장로회신학대에 들어갔다. 내 후임은 권호경목사(현 CBS사장)가 맡았다. 그때가 81년도였으니 내 나이가 34살이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 나는 그곳에서 현대신학연구회(약칭 현신)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40명 정도의 회원을 둔 조직이었는데, 그때 한 학년의 수가 1백50명에 불과했으니 현신은 우리 학년의 20~30%를 포괄하는 대규모 조직이었다. 현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면서 장로회 신학교 운동권 조직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82년 1월초 나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의 길에 오른다. 원래 나는 신학교에 들어갈 결심을 한 뒤 장로회신학교와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 두 곳에 입학허가요청을 했다. 그전에 장로회신학교에서 입학허가가 되었다가 취소되었던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입학이 허가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뒤 프린스턴에서도 초청장이 왔다. 그 당시 아내는 교회여성연합회에서 프로그램 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함께 유학가기를 간절히 원했다. 한국에서는 두 사람 모두 공부하기가 어려운 반면 미국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둘다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원래 이대사회학과 재학중에 외국유학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나를 만나면서 유학을 포기하고 옥바라지만 실컷 하게되었다. 나는 이점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김용복박사(전주한일신학대학교 총장), 박세일, 김용담판사 등 가까운 사람들도 내게 유학갈 것을 적극 권했다. 나도 운동에서 한걸음 뒤로 물러나 좀더 넓은 세상에서 5~6년 동안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가겠다는 결심을 굳혔으나, 그러고 나니 과연 정부에서 나의 출국을 허락할 지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정부에 압력을 가하기도 하고 아는 친지들을 동원해 설득하기도 해서 결국 출국 허가를 받아내었다.
그 뒤에도 짐을 들고 공항에 나갔다가 공항출국금지자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는 바람에 되돌아 오는 등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82년 1월 드디어 아내와 함께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출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어느 날, 가까운 후배인 김경남(목사)이 나를 찾아왔다. 그때 당시 내가 유학가는 것을 후배들은 좋지 않은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김경남도 마찬가지였다.
경남이가 내게 말했다.
“경석이형, 미국에 가서 반드시 박사가 되어서 돌아오시오. 그리고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시오. 다만 NCC총무는 하지 마시오. 한국에 남아 있는 우리같은 사람도 출세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소”
나는 경남이의 말을 들으며 무척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비록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절대로 박사학위를 받지는 않겠다. 그리고 돌아와서 반드시 다시 운동을 하겠다”
결국 나는 미국에서 끝내 박사학위를 받지 않았다.
이만열교수 같은 이는 내게 이왕에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났으니 박사를 따서 돌아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날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 떠날 때부터 박사학위는 결코 따지 않으리라고 결심했고,끝내 이 결심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