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1-11-22 09:29
   <한국의 아브라함 집안>에서 <아 나도 기독교운동을 할 수 있겠구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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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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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브라함 집안


사람들은 흔히 우리 집안을 ‘한국의 아브라함 집안’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 집안의 내력을 쭉 훑다 보면 ‘한국 교회 최초’라는 말이 적어도 일곱번은 나온다.

우선 나의 증조할아버지인 서경조목사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셨고,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셔서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영군 소래마을에 세우신 분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그 뒤에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새문안교회(80년대말에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를 언더우드목사님과 함께 세우시고 함께 목회를 하셨다.

증조할아버지의 형님인 서상륜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성경책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한국에 들여와 보급하신 분이고, 조부되시는 서병호장로님은 한국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으신 분이다. 아버님과 어머님도 새문안교회에서 장로,권사이시고 최근 나보다 한살 위인 형님 서원석장로가 새문안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우리집안에서 4대째 장로가 되셨다.

4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적인 가풍 덕분에 내 삶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적 문화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 내 경우도 태어나자 마자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갓난 아기 시절부터 부모님의 품에 안겨 교회를 다녔었다.

우리 집안의 또 다른 소중한 전통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지신 할아버님의 애국 정신이다. 실제로 서병호 할아버지께서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당수로 활동하셨고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의원 겸 내무위원을 지내시기도 하셨다.

이러한 관계로 할아버지 서병호장로와 아버지 서재현장로 부자가 함께 독립운동의 공로로 대통령표창 애국장을 받으시기도 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상해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했던 김규식박사의 부인 김순애씨는 나의 이모할머니시다. 서구 문화를 비교적 일찍 받아들인 덕분에 나의 친가와 외가의 어른들께서는 아들,딸에 상관없이 가능하면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던 분들이셨다.

때문에 아버님은 상해국립동제대학 기계과와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상해 시절부터 기계공장의 책임자를 지내신 원로 엔지니어시고,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께서도 남경의 금능대학(지금의 남경대학)을 졸업한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문 인텔리여성이셨다.

아버님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할아버님 때문에 학비를 제때 마련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다. 그러나 공부를 마치고 중경에서 중국 철공장의 부사장,사장을 지낼 당시엔 그곳 한국인 가운데 월급을 가장 많이 받아 경제적으로 안정되었고, 덕분에 우리 집은 그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이 지방에서 올라오거나 형편이 어려울 때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이런 부모님을 둔 덕분에 나는 어린 시절에 가난을 모르고 자랐다. 아버님께서는 48년 8월 상해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우리나라에서 기계공장으로서는 최대 규모인 인천의 ‘조선기계제작소’의 기술 부분 최고 책임자를 지내셨고, 그 뒤에는 해군에 입대해 해군준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진해 해군공창장과 인천해군공작창장을 지내셨다.

아버님은 이렇게 그때로서는 보기 드물게 석사학위까지 받으신 엔지니어이자 최고 경영자였지만, 독립운동을 하신 부모님의 영향 때문에 사회정의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 분이셨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아버님의 이런 성품 덕분에 6.25전쟁 당시 큰 화를 당할뻔하다가 모면하기도 했다. 아버님은 고국에 돌아온 뒤 처음 부임한 회사에서 노동자들의 월급을 인상하자고 건의했다가 사장이 받아들이지 않자 사표를 내고 나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받아들인 ‘조선기계제작소’로 회사를 옮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 6.25가 터지자 미처 피난하지 못했던 우리 가족은 아버님이 큰 공장의 고위간부라는 이유 때문에 큰 화를 당할 뻔 했는데, 회사 노동자들이 아버님을 변호해줘서 화를 면했다.

그 뒤 국군이 인천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또 아버님이 이북에 협조했다는 부역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에도 우리 집안은 ‘사장까지 도망간 공장을 홀로 지켰다’는 아버님의 사명감이 인정되어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시면서 부모님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때 그때 옳은 일을 하는 게 중요하고, 결국 그것이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 줬다’는 신념을 갖게 되셨다고 한다.

이런 부모님의 인생철학은 내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 공대 2학년 시절 내가 사회과학 공부를 하겠다며 부모님 몰래 무작정 휴학계를 내버리자 아버님께서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처음으로 내 뺨을 때리셨다. 그리고 한동안 아버님과 나는 서로 눈길이 마주치는 것조차 피할 만큼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아버님은 그 당시 둘째 아들이 장래가 보장된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혁명에 투신하려는 것을 반대하시긴 했지만, 근검하고 정의로우신 생활태도를 통해 나를 사회정의를 위해 앞장서서 싸우는 투사가 될 수 있는 기초를 세우신 셈이다.

나는 아버님의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는 것이 사회의 정의이며 아무리 고난이 닥친다고 하더라도 스스로가 믿는 정의를 위해 몸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결국 아버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걷는 길이 사회정의임을 인정해 주셨고, 두 아들이 구속되어 각각 20년형을 선고받는 극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를 지지해주셨다.



새문안교회에서 만난 첫사랑


돌이켜 보면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명예와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는 해군제독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가난을 몰랐고, 수재들만 모이던 서울중고등학교에서 가끔 전교 수석을 하기도 하였으니 남부러울 게 없었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163센티미터의 작달막한 키, 남성적인 매력이 별로 없는 평범한 외모,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 봐도 잘 생겼다고 볼 수 없는 얼굴. 이 모든 것들이 그때의 내게는 상당한 열등감의 원천이었다.

특히 이런 열등감은 중학교 2학년 시절 새문안교회에서 만난 한 여학생을 죽도록 짝사랑하면서부터 갈수록 커져 갔다. 이화여중 2학년에 다니던 김상숙이라는 여학생을 나는 끔찍하게 좋아 했었다.

중학생인 내 눈엔 그 여학생이 어찌나 예쁘고 지성적이고 똑똑해 보이는지, 그애 앞에만 가면 나는 내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져 열등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 게다가 그 여학생은 중학생의 나이인데도 가슴이 봉긋하게 나와서 여고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조숙했다. 반면 나는 내 생각엔 정신적으로는 꽤 성숙했던 편인데, 어쩐 일인지 외모로 봐서는 아직도 발육이 덜된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 소년같은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그 때 당시 새문안교회를 함께 다니던 내 친구들은 왜 그렇게 다들 키가 크고 잘생겼었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입가에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기억이지만, 그때 당시 내게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짝사랑은 깊어만 갔고, 나의 열등감도 커져 가기만 했다. 중3 때는 하루 하루의 생활리듬 자체가 그 여학생을 만나는 주일예배가 며칠 남았느냐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목요일부터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해 일요일이면 그 여학생을 만난다는 사실 때문에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정작 교회에 가서는 말도 붙여보지 못했다. 그냥 옆눈길로 슬쩍 훔쳐 보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래도 그렇게라도 훔쳐 보지 못한 날엔 마음이 심란해서 한 주일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이런 판국이니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주일예배 다음날인 월,화요일에나 건성으로 공부하는 시늉을 했고, 일요일이 가까와 오면 완전히 그애를 만난다는 생각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게다가 그당시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 여학생이 나말고 다른 남학생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닌가.

어쩌다가 이런 소문을 듣게 된 날엔 절망감과 열등감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만 했다. 어쩌다가 그 여학생이 내게 한마디 말이라도 친절하게 건넨 날엔 세상을 다 얻은 사람처럼 마음이 들떠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참으로 불쌍하고 딱한 시절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짝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깊었던지 자타가 공인하는 음치인 내가 그 여학생을 따라 고등부 성가대에 가입해 총무를 맡기도 했다. 그 당시 새문안교회에는 고등부가 없고 대신 고등부 성가대가 있었는데, 그 여학생이 거기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님을 따라 강남을 간 셈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내 인생의 전부와도 같았던 그 여학생이 갑자기 미국이민을 간다는 것이 아닌가.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온 몸이 마비되는 것같았다.

‘용기를 내서 그애한테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는 생각과 ‘혹시 만나자고 말했다가 그애한테 딱지를 맞으면 어쩌나’하는 걱정이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다.

하지만 3년 동안이나 내 인생을 휘저어 놓았던 그애가 영영 떠나버린다는 사실은 열등감이고 뭐고 일단은 그애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실천하도록 만들었다. 나는 드디어 용기를 내서 그애에게 3년만에 최초로 데이트 신청을 했다.

‘무조건 한번 만나자’고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여학생도 선선히 그러자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무슨 불행의 장난이었던지 일이 꼬이는 바람에 그애와 나는 결국 만나지는 못하고 그애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 여학생이 미국으로 떠나버리자 나는 한동안을 넋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외국여행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그당시만 해도 ‘미국이민’을 떠났다는 것은 평생 못만나는 먼길을 떠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가 미국으로 이민가지 않았더라면 나는 틀림없이 대학입시에 실패했을 것이다. 그녀가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 학생으로 변신하게 되었는데, 대학 2학년 시절에 그녀와의 놀라운 해후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모르는 여자에게서 집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아주 낯선 목소리여서 내가 누구냐고 묻자 “옛날의 김상숙이라는 여자를 아느냐?”고 되물었다. 내가 “알다뿐이냐. 그 여자로 말하면 내가 중학교 2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죽도록 짝사랑한 여자다.”라고 말했더니 그 여자가 대뜸 “내가 바로 김상숙이다.”하는게 아닌가.

나는 한동안 얼이 빠져 있다가 자기 집으로 오라는 얘기를 듣고 불광동의 김상숙의 집으로 찾아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 집을 찾아가고 있는데, 길에서 어느 처음 보는 아줌마가 내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무심히 내가 쳐다봤는데 놀랍게도 그 여자가 김상숙이었다.

내가 그때 그 애를 아줌마라고 느낀 것은 그녀의 너무나도 변한 모습 때문이었다.

립스틱에 마스카라까지 진하게 하고 있었고, 귀고리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척 살이 쪄 있었고, 옛날과는 달리 말도 많아져 있었다.

그녀는 내가 꿈에 그리던 소녀 같은 이미지의 김상숙과는 너무나 딴판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 애의 변한 모습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김상숙에게 옛날의 고등학교 시설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 애는 그때 미국으로 건너가 어느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다가 잘 적응하지 못해 휴학을 하고 한국에 나와 있던 상태였다.

그후, 몇 차례 첫사랑 김상숙과 데이트를 했다. 그제야 그 애도 고등학교 시절에 내게 꽤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지나간 고통이 보상되는 것은 아닌데.....

한때는 내 키가 작은 까닭에 자기도 키가 작으려고 노력한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참 바보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한참 웃었다.

그러나 김상숙과의 데이트가 그리 흡족하지 않았다. 만날수록 서로가 잘 맞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모습과는 달리 너무나 이데올로기적인 인간으로 변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 그 애의 ‘너무도 자본주의적인’모습들이 모두 나의 눈에 거슬렸다.

반면 그 애는 서로 사랑하면 모든 걸 헌신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민주화 운동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은 그 애의 관심 밖이었지만, 그녀는 그 대신 사랑하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애의 그런 생각이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몇 번 만난 뒤 그 애에게 그만 만나자는 선언을 하고 말았고, 결국 그 애와의 반가운 해후도 여기서 끝이 나고 만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나의 운동적 삶, 이념 등을 공감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적인 여성을 원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시절과 달라진 내게 그 애가 맞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애를 다시 만난 것이 내게 첫사랑의 환산을 깨어주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만약 그 애를 다시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 환상에 매여서 다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 같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당시 내가 지나치게 순교자적인 자세에 빠져서 그 애에게 박절하게 대한 것 같아 한편으로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때문에 나이가 든 후에 그 애를 다시 한번 만나 보려고 수소문을 하기도 했지만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했다.



태백클럽과 평생의 친구들


열등감과 실연의 아픔으로 우울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내게 유일하게 위안을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뜻이 맞는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서울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평생의 친구라고 불러도 좋을 만한 소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서울중학교 2학년때 같은 반을 한 것을 계기로 나는 박세일(청와대 복지담당 수석비서관),박종안,한성민 등 세명의 친구들과 단짝 친구가 되었다. 우리 네명은 다같이 학급에서 10번 안에 드는 키가 작은 학생들이었고, 학교 성적도 다들 좋았다. 비슷한 점이 많았던 셈이다.

이 친구들과는 서울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도 친하게 지냈다가 그뒤에 함께 YMCA 서울고지부인 태백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대략 18명 정도가 멤버였는데, 대부분 공부를 잘하는 우수한 학생들로 알려져 있었다.

현재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멤버로는 박세일수석, 김영삼정부 초기에 서울시장을 잠깐 지냈던 김상철 변호사, 임성준 외무부 미주국장 등이 있고, 김유환 고려합섬 부사장, 오수성(전남대 교수) 등도 이 모임의 멤버였다. 이들과는 청년 시절에는 물론이고 장년이 된 지금도 가깝게 지낸다.

이 가운데서도 박세일은 중학교 시절에 만나 지금까지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데, 박세일이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수석비서관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나는 이친구와의 오랜 우정 탓에 이런 저런 오해를 많이 받았다.

태백클럽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단체라기보다 산이나 바다로 놀러도 다니고 야외캠프도 여는 등 멤버들끼리 만나서 친목을 다지고 머리도 식히는 그런 특별활동 모임같은 것이었다.

태백클럽 멤버들은 토론을 벌이는 것도 아주 좋아 했다. 특히 나랑 박세일은 틈만 나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인생문제에 관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박세일은 여승이 된 이모를 둔 탓에 일찍부터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적 이해도 상당히 깊은 편이었다. 때문에 나도 친구를 잘 둔 덕에 불교의 심오한 철학을 진작부터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나는 ‘한국의 아브라함 집안’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자손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에는 종교적인 문제가 주제로 올랐다가 나중에 인생, 사회문제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에 열을 올리곤 했다.

나는 세일이 덕분에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절에서 지낸 시간이 꽤 많다. 세일이와 함께 절에 가서 하루에 10시간 씩 공부를 하다가 새벽녘이면 절 마당에 나와 인생을 이야기했던 기억들이 지금도 아련히 떠오르곤 한다. 생각만 해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 당시 우리의 관심사가 잘못된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우리가 어설픈 철학용어를 써가며 열띠게 토론했던 인생의 온갖 문제들, 그리고 토론을 하며 키웠던 순수한 열정들이 참으로 값지게 느껴 진다.

그리고 실제로 이때 가슴에 품었던 아름다운 이상과 순수한 열정이 그뒤 우리가 우리사회의 부정한 모습을 보았을 때 몸을 아끼지 않고 민주화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치열한 삶의 태도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학창 시절을 떠올리면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이 무전여행에 얽힌 추억이다. 그 당시 고등학생들 사이에서는 무전여행이 무척 유행이었는데, 나도 김상숙이 미국으로 떠난 직후인 2학년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함께 무전여행을 떠났다.

비상금 3천원(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만원 정도)만 몸에 지니고 10여일 동안 문전걸식을 해가며 전국을 돌아 다녔는데, 우리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처음 돌아본 귀중한 경험이었다.

이러한 무전여행의 낭만과 열정을 요즈음 젊은이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생각까지 든다.

이런 점말고도 무전여행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준 소중한 경험이기도 했다. 기차에 무임승차했다가 표검사를 피해 기차 지붕 위에 올라 갔다가 그만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쓰고 있던 학생모를 날려 버린 일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김유환은 기차가 역에 진입하자 표검사를 피해 기차 지붕에서 뛰어내리다가 똥통에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무임승차로 걸려서 역전 청소를 한참 하고서야 풀려 났다. 지금도 기억을 떠올리기만 하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추억들이다.

나도 집을 떠난 지 열흘쯤 되어서는 돈이 다 떨어져서 여차하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올라와야 하는 사태를 당하기도 했는데, 꼼꼼하고 야무진 성격의 세일이가 비상금을 숨겨놓아 그돈으로 완행열차를 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이런 소중한 경험들이 ‘외모 컴플렉스’와 실연의 아픔 속에서도 나를 활달하고 공부잘하는 학생으로 그럭저럭 지낼 수 있도록 해준 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대 수석합격으로 모교의 명예를 살리자


짝사랑의 열병이 깊어지면서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뭐니뭐니 해도 학과 성적이었다. 나는 외모나 남성적인 매력에 있어서는 열등감을 갖고 있었지만, 학과성적에서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나는 그 당시 수재들만 모인다던 서울중에서도 더러 전교수석을 차지할만큼 공부 하나만은 잘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부터는 성적이 뚝 떨어져 반에서 6등을 하다가 2학년에 올라간 뒤에는 반에서 13등까지 성적이 떨어졌다.

나는 엔지니어였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에 어려서부터 엔지니어가 될 꿈을 키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내 목표는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공대 박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랑의 열병이 극한상황으로 치달았던 고2 시절에는 성적이 전교 100등 밖으로까지 밀려나서 그 상태로는 서울공대에서도 가장 센 학과에 속하는 기계과에 진학하기가 어려운 상태였다.

‘이러다가는 기계과는 커녕 서울공대 뱃지도 못달게 될지 모르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다가 그때는 나를 열병에 시달리게 했던 짝사랑의 여학생도 기약없는 미국 이민의 길을 떠난 뒤였다.

나는 태백클럽 친구들과 무전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2말 겨울방학 때에는 박세일, 김유환, 양남선과 산골의 작은 암자에 가서 한달 동안 지독한 공부를 시작했다.

하루 6시간씩 자고 눈만 뜨면 책을 파고 들었다.

이때의 공부가 효력을 발생했던지 나는 고3에 올라가서 처음 치른 모의고사에서 이과 전체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때 수학문제가 굉장히 어렵게 출제되었는데, 수학을 가장 잘했던 내가 100점을 받았고, 결국엔 전교 1등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전교 석차 100등을 밑돌던 내가 갑자기 이과 전체에서 1등을 차지하자 처음엔 ‘도대체 서경석이가 누구냐’며 놀라던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몇차례를 제외하고는 고3 내내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이과 전체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졸업 할 때의 성적도 모의고사 성적으로는 이과 전체 1등이었다.

그런데 당시 문과 전체 수석은 태백클럽 회원이기도 했던 김상철(변호사)이었다.

졸업을 3개월쯤 남겨둔 어느 날, 김상철이 나한테 여관에서 함께 묵으며 서울대 수석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보자고 제의를 해왔다. 김상철도 아주 가깝게 지내던 친구였다.

나는 상철이의 제의를 받아 들여 3개월 동안 서울대 수석합격을 목표로 여관에서 합숙에 들어 갔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했다.

나보다 상철이가 공부를 더 열심히 했었는데, 결국 나나 상철이나 둘다 서울대 수석합격의 영예는 누리지 못했다.

다만 목표로 삼았던 서울공대 기계과와 서울법대에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나는 질풍노도와 같은 대학 시절을 맞게 된다.



공대가 싫다


나는 어릴 적부터 품었던 엔지니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했다. 서울공대 기계과에 진학했으니 나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고,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대인 까닭에 공대생의 인기가 무척 높았다.

그러나 정작 내가 원하던 학과에 진학하고 난 뒤부터 나는 내가 공대생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내 눈앞에 비친 공대생들의 모습은 시간만 나면 미팅하고 연애하고 당구치고 카드놀이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역사의식에는 별 관심이 없이 출세나 꿈꾸는 그런 모습으로 느껴졌다.

반면에 법학과(박세일), 경제학과(박종안) 등에 진학한 고교 시절 친구들은 만나면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부터가 달랐다. 내가 공대에서 미적분을 푸느라 골머리를 썩히고 그친구들을 만나러 가보면 그네들은 ‘민족주의’니, ‘사회주의’니, ‘매판자본’이니 하는 어려운 사회과학적 용어를 써가며 마치 자신들이 혁명 투사나 된 것처럼 열띤 토론을 벌였다.

실제로 그 당시 박세일은 법대 이념서클인 동숭학회에, 박종안은 경제학과 서클인 경우회에 가입해 하루가 다르게 변모해가고 있었다. 동숭학회의 경우 이영희교수(여의도연구소 전소장), 이협 국민회의 의원, 고 조영래변호사 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쟁쟁한 선배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동기로는 박세일, 정일수(변호사), 양건(교수) 등이 멤버로 가입해 있었다.

한 마디로, 순진한 공대생이었던 나로서는 또 다시 공대생 컴플렉스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당시엔 공대는 태릉, 법대는 지금의 대학로, 상대는 종암동에 있었는데, 공대에서 수업을 마치고 법대나 상대 캠퍼스에 가면 웬지 나만 뒤떨어지고 있는 것같아 마음이 우울했다.

또 한편으로 나는 대학 1학년 시절엔 학교 공부보다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학직후부터 전기물, 사회과학서적, 수필집 등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쓸데 없는 잡념을 줄이고 책읽는 데만 전념하기 위해 아예 거처도 집에서 기숙사로 옮겨 버렸다.

1학년 여름방학 때엔 아예 세일이와 함께 책을 한보따리 싸가지고 절에 들어가 철학서, 사회과학서적, 문화사에 관한 서적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당시 나를 감동시켰던 책으로는 안병욱교수의 엣세이집들, 에리히프롬의 철학서, E․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 등이다.

그리고 이처럼 치열했던 1학년 여름방학이 지나고 나자 나는 애벌레가 허물을 벗은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유복한 집안의 구김살 없는 모범생의 모습에서 세상 고민을 다 짊어 진 듯 늘 심각한 표정을 짖고 다니는 ‘고뇌하는 철학 청년’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나는 대학에 입학한 직후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단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내 신앙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신입생 시절 내 독서목록에는 신학책도 많이 들어 있었는데, 책을 읽을수록 내가 확신도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있다는 것이 새삼 절감되었다.

비록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하느님을 받아들인 모태신앙이긴 했지만, 그 당시의 내 모습은 어떤 절실함도 열렬함도 뜨거움도 없는 한마디로 뜨뜻미지근한 신앙인에 불과하다는 회의가 나를 괴롭혔다.

나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독교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는 것은 내 삶의 근거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는 이런 고민을 풀어 보려고 새문안교회 대학생 공부모임에 참석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신앙고백을 했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신학공부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신앙적인 확신은 점점 더 엷어져 갔다.

그뒤 우연히 CCC에서 주관하는 입석수양관의 여름수련회에 참석했다가 박성준이라는 선배가 흔들리고 있는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잠시 열정적인 신앙심을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때의 열정도 또 다른 작위적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흐지부지되었고 오히려 신앙적 갈등이 훨씬 증폭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한 마디로 말해 대학 직후의 시기는 그전에 내가 가지고 있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 엔지니어가 되려던 목표, 이 모든 것이 뿌리채 흔들리는 시기였다.

그리고 얼마 뒤 CCC안에 있던 경제복지회라는 운동권모임에 참여하게 되면서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시절을 열게 된다.



‘경제복지회’와의 만남


‘경제복지회’는 공대생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던 내게 운동권 학생의 길을 안내한 최초의 모임이었다. CCC 입석수양관에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던 박성준(통일혁명당 사건으로 15년형 선고) 선배가 ‘경제복지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경제복지회’는 당시 경제학과에 다니던 학생들이 주가 되던 모임이었는데,공대생으로서는 유일하게 나만 참여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내 대학시절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는 훌륭한 선배들을 무더기로 만나게 된다.

예를 들면 회장이었던 박성준씨를 포함해 강철규, 김근태, 유창식, 홍용찬씨 등이 ‘경제복지회’에서 내가 처음 만난 선배들이다.

특히 박성준씨는 그 당시 어설픈 ‘철학청년’인 내가 보기엔 너무나도 훌륭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경스런 선배였다. 카리스마도 대단해서 내 경우에도 박성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과 자극이 되었다.

박성준씨는 그당시 나보다 9년 위인 서울상대 경제학과 4학년 휴학생이었는데,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철저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후배들도 그 선배 앞에만 가면 존경심과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박성준씨의 부인이었던 한명숙(여성민우회 전회장)씨는 CCC부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운동권 여학생이 거의 없던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사회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때문에 많은 후배 남학생들이 한명숙씨를 자신의 미래 배우자감 모델로 삼곤 했다.

나도 한명숙씨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여자와 결혼해야겠다’고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결국 나는 박성준 선배에게 사회과학 공부 지도를 부탁하게 되고, 얼마 뒤 몇몇 친구들과 함께 본격적인 비밀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당시엔 몰랐지만, 뒤에 알고 보니 박성준씨는 그때 이미 신영복(통일혁명당 사건 장기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씨로부터 공산주의지도를 받아 거의 사회주의자로서 확신을 갖고 있던 그런 단계였다. 따라서 우리의 비밀과외도 말하자면 사회주의 학습을 받는 것이었다.

5명이 모여 거의 1년 이상 비밀지도를 받았는데, 그 과정이 끝나고 나자 우리 5명은 모두 사회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과외를 받으면 받을수록 사회주의가 그당시 사회의 여러가지 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설명해주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견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나를 괴롭히던 모든 의문이 속시원히 풀리는 논리적인 근거를 이제야 찾았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주의에 심취한 나는 사회과학 공부를 좀더 본격적으로 하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대학 2학년 때 부모님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과감하게 1년 휴학을 결정한다. 사실 나는 대학 1학년을 마치면서부터 굉장히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기계과 2학년은 공부할 분량이 아주 많은 때이다. 서울공대 가운데서도 기계과 2학년과 화공과 3학년 때는 공부할 분량이 많은 때로 정평이 나있다.

기계과의 경우 동역학, 유체역학, 고체역학, 열역학 등 공부하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역학을 4개나 해야 하는 탓에 그것을 따라 가는 데만도 애를 먹는다. 따라서 사회과학 공부와 기계과 전공 공부를 병행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왔다.

결국 사회과학 공부냐, 전공공부냐를 두고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 서게 된 것이다.

그때 박세일이 내게 아예 1년을 휴학하고 사회과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당시로서는 기계과 학생이 다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이유로 1년씩 휴학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망설여지는 마음이 없지 않았으나, 전공 공부에 워낙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데다 사회과학 공부에 대한 갈증이 워낙 강한 까닭에 나는 부모님도 모르게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말았다.

며칠 뒤 고민 끝에 내가 1년 휴학계를 냈다는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노하셨다. 아버지는 너무도 착한 분이셔서 부하들에게나 가족들에게나 크게 화를 내는 적이 없었다.

때문에 나는 내 평생 아버지가 그처럼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날 아버지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뺨을 한 대 때리셨다.

“지금 내 나이가 몇 인줄 아느냐. 철이 없다고 어떻게 그런 일을 혼자서 덜컥 저지르느냐. 너가 빨리 대학 졸업을 해서 동생도 거두고 그래야지, 어째 그리 철이 없느냐”

아버지께서는 평생 처음 내 뺨을 때리시고는 탄식하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실제로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이미 환갑이 지난 나이여서 당신께서 더 연로하시기 전에 자식들을 빨리 키워서 자리잡게 만들어야겠다는 부담감을 많이 갖고 계셨다.

그런데 가장 기대를 모으던 둘째 아들이 덜컥 휴학계를 내버렸으니 어찌 화가 치밀지 않았겠는가. 나도 평생 처음 아버지께 뺨을 맞고 아버지의 눈물까지 보면서 마음이 무척 아팠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젠 집안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그 뒤 집에서 나와 독서실에서 숙식을 하면서 1년 동안 본격적으로 사회과학 공부에 몰두하게 된다. 말하자면 앞으로 10여년간 계속되는 운동권 투사로서의 소양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한 것이다.



‘경석이, 너는 위선자다’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깊어질수록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이땅의 민초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되새기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부모님과 마찰을 빚어가면서까지 나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박세일이 내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경석이, 너는 위선자다. 말로는 사랑, 사랑하면서 실제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 박세일이 내게 던진 폭탄과도 같은 말이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비수와도 같은 말을 듣고선 한동안 얼이 빠졌다. 만약에 나를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면 ‘별 웃기는 놈도 다 있군’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세일은 중학교 때부터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가까운 친구였고, 어떤 의미에서는 나의 모든 것을 부모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친구였다.

게다가 나는 그 당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돈으로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세일이를 나름대로 힘껏 돕기도 했다. 말하자면 나로서는 나름대로 사랑을 실천했던 셈인데, 그런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세일이가 ‘위선자’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동원하면서 나를 비판한 것이다.

세일이의 뼈아픈 문제제기가 있은 뒤 며칠 동안 나는 ‘나의 어떤 모습이 세일이에게 위선자의 모습으로 비춰졌을까’하고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세일이의 지적처럼 내게 실제로 위선적인 면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겐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었다. 선민의식이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된 선택된 사람이라는 뜻’인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탓에 내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선민의식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실제로 그때까지 술,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는 청교도적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지금도 그런 전통이 다소 남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신입생 환영회에서거의 모든 신입생들이 ‘술 마시는 법’을 배웠다.

신입생 환영회란 것이, 선배들이 지켜 보는 앞에서 신입생들이 무조건 사발로 막걸리를 들이 마셔야 하는 자리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내 결심을 흐트러 뜨리지 않기 위해 신입생 환영회 자리까지 도망쳐 나왔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내 마음 깊은 곳에 ‘술 먹고 담배 피고 당구치고 연애나 하는’ 친구들을 깔보는 마음이 은근히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말로는 친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그 친구들을 은근히 경멸하고 나만 깨끗하고 도덕적이라는 자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기독교에 대해 회의를 느끼던 내겐 이 모든 것들이 어릴 때부터 몸에 익은 기독교 문화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사회주의자의 소외된 민중에 대한 사랑과 비교하면 기독교인들의 사랑이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1967년 당시엔 박정희정권의 독재체제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기성교회들은 우리사회를 민주화시키려는 사회참여운동에는 관심도 없었다.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평생을 살겠다고 결심을 한 내겐 이런 교회의 모습이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모습으로 보였다. 그런데 내게도 그런 기독교인들의 모습처럼 위선적인 모습이 보인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뒤부터 이런 가식적인 기독교 문화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어느 날 비장한 결심을 하고 가게에서 ‘박하 담배’ 한갑과 성냥을 샀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 잔디밭에 앉아 그 자리에서 무려 17대의 담배를 한꺼번에 피웠다.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다가 갑자기 17대를 한자리에서 다 피우고 나자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되어 버렸다. 나는 머리 속까지 담배 연기가 꽉 찬 것같은 멍멍한 기분으로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죄인이 되었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제부터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選民)이 아니다’

실제로 나는 그때부터 담배를 피기 시작해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는 날 아침에야 담배를 끊었다.

건강을 위해서 일부러 담배를 끊는 요즘 시대에 생각하면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이처럼 결단이 필요했던 내 모습이 한편으로는 우습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는 것으로 상징되는 기독교문화와 의 단절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 뒤로 교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당시 새문안교회 홍성현목사님을 찾아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총무직도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 있겠습니까’

새문안교회를 세운 창시자의 증손자인 내가 이런 말을 하자 교회 어른들은 어이가 없어 나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에 깊이 빠져 있던 나로서는 이런 모든 말들이 내 결심을 흐뜨려놓는 유혹의 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독서실과 도서실에 파묻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 당시엔 사회주의에 관한 책은 모두 금서여서 번역본이 없었다.

때문에 일어로 번역된 사회주의 원전을 우리말로 또 다시 번역해 손으로 베껴쓴 필사본이 학생들 사이에 나돌았는데, 나도 그것들을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 자본론, 고리끼의 어머니, 정치론, 맑스주의경제학, 모택동의 모순론, 신식민지론 등을 모두 필사본으로 읽었다.

일어 원전을 읽기 위해 일어를 공부하기도 하고, 필사본을 보관해두고 읽기 위해 노트에 베껴두기도 했다. 복사기가 없는 시절이니 그 내용을 두고 두고 읽으려면 또 다시 일일이 노트에 베껴 두어야 했지만, 사회주의 이론에 대한 나의 탐구열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리고 1년간이 지나가자 나는 완전한 사회주의자, 아니 공산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앞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소총수가 되겠다’고 결심하곤 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혁명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는 이름 없는 혁명의 전사’.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열정이 끓어 오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얼치기 사회주의자의 꿈을 키우던 나는 나의 신념과 의지가 얼마나 보잘 것없는가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얼치기 사회주의자가 겪은 ‘통일혁명당 사건’


휴학하는 몇 개월 동안 사회주의 신념으로 완전 무장을 한 나는 늦봄부터 실제로 조직화 사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나를 사실상 사회주의자로 의식화시켰던 박성준선배가 ‘경석이 너는 민중의 삶을 너무 모르니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교육하고 함께 지내는 경험을 갖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먼저 나는 우리 동네 근처의 거렁뱅이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당시 문화촌에 살았는데,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빈민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곳에 사는 내 또래들을 사귀어서 조직화하는 게 나의 목표였던 셈이다.

때문에 나는 그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내 또래 거렁뱅이들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어 보려고 눈치를 살피곤 했다.

그렇게 노력한 덕분에 나는 결국 빈민촌에 사는 몇명의 내 또래들을 친한 사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단 친해진 뒤 나는 그애들에게 아침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해 매일 아침 40분간 문화촌에서 세검정까지 달리기를 했다.

지금은 그길이 모두 아스팔트길로 변했지만, 그때만 해도 그길엔 자두밭이 많았다. 나는 빠알간 자두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길을 그들과 함께 뛰면서 내가 게릴라전의 전사를 기르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나도 그들과 함께 게릴라전의 소총수가 되리라고 몇번이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박성준선배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고, 나도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나는 나의 혁명가적 자질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절감하고 수치스러움에 절망하게 된다.

내가 문화촌 빈민가 젊은이들과 사귀는 일에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어느 날, 박성준씨의 부인인 한명숙씨가 급하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만나 보니 짐보퉁이와 가방을 박성준선배와 한명숙씨가 매우 당황스런 모습으로 나와 있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연락없이 나오지 않아서 지금 짐을 싸서 도망가는 중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꼼짝 않고 숨어 있을 테니까 절대로 잡히지 않을 거다. 잡혀도 절대로 너희들이 비밀과외를 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마라”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박성준씨가 내게 한 말이었다.

매일 밤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곤 했지만, 막상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고 생각하니 머리 속이 혼란해졌다. 하지만 그당시엔 박성준선배에 대한 믿음과 존경심이 워낙에 강했던 탓에 내가 그 사건에 연루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신문 1면 톱기사로 ‘통일혁명당’사건이 보도되었고, ‘도둑놈 얼굴’처럼 거무튀튀한 흉칙한 얼굴들이 간첩, 수괴, 조직책 등 무시무시한 단어들과 함께 신문을 메웠다.

그리고 그 속에 박성준선배의 얼굴도 들어 있었다. 신영복선생의 바로 밑 조직책으로 나와 있었는데, 그야말로 얼핏 보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흉칙한 모습이었다.

그당시 나는 박성준선배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었는지,숨어서 지내는지 잡혔는지도 몰랐다. 때문에 신문보도를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던 어느 날, 험악하게 생긴 건장한 남자들의 팔에 이끌려 나도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 갔다.

그 전에 박성준선배와 함께 잡혀갔다가 먼저 석방이 된 한명숙씨가 우리에게 조사받을 준비를 하라고 일러 주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수사관에게 붙들려 가는 경험은 대학2학년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건장한 팔에 이끌려 빨간 색 건물안으로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말을 맞춘 것 이상의 내용이 불거져 나오는 일이 없기를 초조하게 기도하였다.

실제로 나는 조사관이 묻는 말에 제대로 답변을 안하다가 우락부락하게 생긴 조사관에게 신발로 몇대 얻어 맞고 나자 정신이 주눅이 들어 그들이 묻는 대로 다 말해 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대학생이 불순한 선배의 꾐에 잘못 빠져서 나쁜 공부를 한 것처럼’ 참회하는 표정까지 짓곤 했다.

조사가 끝나면 매트리스를 깔고 그위에 누워 또 다른 매트리스를 덮고 잠시 동안 누워있을 수 있었다. 이렇듯 잠깐이나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제발 나를 미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앞으로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친구들은 며칠 뒤에 별탈 없이 풀려 났다. 조사를 받고 나오자 여러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지만, 나는 조사 받을 당시 비굴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 창피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사관들 앞에서 왜 좀더 의연하지 못했을까.

창피스럽고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나를 위로해준 것은 다름 아닌 성경 말씀이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로마서의 구절이 그것이다. 나는 그전에는 이 구절이 인간을 너무 나약하게 만든다며 싫어 했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너무나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고 나자 이 구절이 얼마나 해방의 메시지인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빚진자다. 그러나 아마도 언젠가는 이 빚을 갚을 날이 오게 되리라’라고.

그리고 2년 뒤에 나는 새문안교회에서 전태일의 추모데모를 주동하면서 이때의 마음의 빚을 갚게 된다.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리라


얼치기 사회주의자인 내가 처음 겪은 시련의 경험은 거의 1년간 나를 방황하도록 만들었다.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숱하게 던져 보았지만, 명쾌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고 혼란과 방황, 무력감과 수치심이 나를 갉아 먹고 있었다.

그 당시 내게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조영래선배(변호사)와 김근태선배(국민회의 부총재)였다.

이 두선배가 박성준선배의 구속으로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중심을 못찾고 흔들리던 나를 따뜻하게 챙겨 주었다. 조영래선배는 박세일의 동숭학회 1년 선배였는데, 둘다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인지 무척 가깝게 지냈다.

나는 세일이의 소개로 조영래선배를 알게 된 뒤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나의 생활과 사회과학 공부에 대해 지도받았다.

김근태 선배는 경제복지회 활동을 할 때 만난 1년 선배였다. 김근태선배도 육개월 동안 몇주에 한번씩은 반드시 나를 만나서 사회과학공부도 지도해주고 내가 학생운동가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들 선배들이 바쁜 와중에도 나를 그처럼 챙겼던 것은 서울공대에 학생운동가가 나말고 아무도 없었던 것이 이유였을 지도 모르겠다. 운동권 선배 한명 없이 혼자 고민하는 내 모습이 두 선배들의 눈에 무척 딱하게 보였을 것이다.

선배들의 보살핌 덕에 다소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은 이후에도 내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질문이 여전히 해결해야 하는 부담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2학년 때 휴학계를 내면서 사실상 기계과 공부를 포기하고 고대철학과에 전과해서 본격적으로 사회개혁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휴학이 끝나갈 무렵에는 그냥 기계과에 다니면서 대충 졸업장만 따고, 나의 에너지는 사회과학 공부, 사회적 실천에 모두 쏟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학과로 전과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기계학도로서 엔지니어의 삶을 살 것인가, 사회운동에 몸을 바칠 것인가를 두고 여전히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60년대 말엔 우리사회의 공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될 때여서 엔지니어의 삶은 그야말로 부와 안정이 보장되는 삶이었다. 반면 혁명가의 삶은 끔직한 미래가 불을 보듯 예측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나는 3학년 여름 방학에 이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회과학 공부를 위해서 절에서 여름방학을 지내던 어느 날, 촛불을 켜놓고 골똘하게 고민을 하다가 결단을 내렸다.

‘나는 과연 우리나라의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 살것인가, 아니면 생산관계의 발전을 위해서 살것인가. 전자를 원한다면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되어서 열심히 기술혁신을 하면 되고, 후자를 원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로 바꿔서 생산력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해 살면 된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 그날 밤 내가 촛불 아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결론은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는 것이었다.

지금 학생들로서야 공대생이 학생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는 게 그처럼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당시엔 공대 출신 학생운동 선배가 한 사람도 없었던 까닭에 순진한 공대생의 신분으로 사회혁명을 위해서 살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 내게는 망망대해에 돛단배를 띄워 놓은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나는 그 때 당시 거의 순교자적 심정으로 이런 결단을 내렸다.

요즘 들어 공대를 함께 다닌 친구들을 만나 보면 그 친구들이나 나나 삶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그친구들은 대부분 회사원이거나 사업가이고 나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지만, 젊은 시절 내가 마치 만주로 떠나는 독립운동가처럼 비장한 각오를 했어야 할만큼 극단적으로 구별되는 삶은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그 당시 내겐 엔지니어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정말로 큰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이런 결심이 서울공대에 학생운동의 싹을 틔우게 만들어 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 나도 기독교운동을 할 수 있겠구나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혁명가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난 뒤 나는 먼저 새문안교회를 사회운동의 보루로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우선 나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를 의식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휴학 기간 중에 홍성현목사의 부탁으로 대학생회 회장을 맡게 되었던 까닭에 자연스럽게 1학년 후배들에게 사회과학 공부 지도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지도하던 학생들 가운데 원정연(당시 서울법대 1학년, 현재 한국 노총근무), 윤조덕(현재 산업안전 연구원), 정인승(서울대 경제학과1년,사망) 등이 뛰어난 후배들이었고, 이들 이외에도 4~5명의 학생들이 내게 사회 과학 학습을 받았다.

나는 후배들에게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심어주고 사회과학적 인식을 넣어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내가 6개월 정도 회장을 맡고 나서 대학생회 회원(대략 26명 정도)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더니 그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는 수가 고작 3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못믿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대학생회가 완전히 무신론에 장악당한 셈이다. 회원의 수도 50여명으로 늘어 났다.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던 새문안교회에 드디어 운동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나는 대학생회 활동을 통해 의식화를 시킨 후배 원정연, 정인승과 함께 창신동 판자촌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소위 ‘민중속으로’라는 구호가 막 나오려 할 때였는데, 나도 민중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가능하다면 그 지역 주민들과도 접촉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그 즈음엔 모든 일을 순교자적인 비장한 심정으로 결심하고 실천했던 터라 창신동에 들어간다는 것도 내게는 하나의 결단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실제로 나는 널찍한 문화촌 집에서 나와 창신동 판자촌의 삭월세 단칸방으로 짐을 옮겼다. 겨울 방학 기간이어서 문풍지로 겨우 바람만 막은 허술한 단칸방은 몹시도 추웠다.

밤에 방에 누워 잠을 청하려면 매서운 겨울바람에 얻어맞은 문풍지가 여우 울음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공동수도에 가서 식수를 길어 와야 했다. 평생 처음 물지게를 지고 뒤뚱 뒤뚱 달동네 길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민중이 된 것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처럼 고달픈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소풍온 국민학생처럼 고생을 즐겼던 내 모습이 참으로 낯뜨겁게 느껴진다. 좋은 집을 놔두고 판자집에서 무작정 사는 것이 ‘민중 속으로’의 참의미가 아니었을 텐데도 나의 ‘민중 속으로’는 그처럼 유치한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창신동에서 체험한 밑바닥 서민들의 삶은 내게 내 주변의 유복한 환경에 대한 불신과 분노를 더욱 깊게 만들고, 학생운동가로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요일마다 새문안교회의 빨간 양탄자와 사치스러운 꽃꽂이를 바라보면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예수가 다시 오신다면 새문안교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창신동 판자촌 산꼭대기로 올 것이다’

그 당시 내게 큰 고민이 있었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회운동을 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한 때 나는 무신론자를 자처하며 교회조차 나가지 않고 지냈지만, 기독교 문화의 잔재가 워낙에 깊었던 까닭에 나는 결코 완전환 무신론자가 될 수는 없었다.

입으로는 ‘무신론자다, 유물론자다’라고 말하면서도 조금만 몸과 마음이 고달파지면 나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을 찾았다.

나는 내 자신 속에 자리잡은 이러한 모순점을 풀기 위해 이전부터 박성준선배와 기독교와 사회주의에 대한 토론을 자주 했었다.

그 당시 박성준선배는 사회주의 이론 가운데 변증법만 받아들이고 유물론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유물론자가 된다는 것은 곧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므로 박선배는 사회주의 운동론은 받아들이되 하느님을 부정해야 하는 유물론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유물론자냐 아니냐를 명확하게 결정지을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사회운동에 헌신하고자 결심한 내가 가장 먼저 풀어야할 과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헌신예배에 초청 설교자로 온 오재식선생(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장, 참여연대 공동대표)을 만나면서 진보적인 기독교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날 오재식선생은 설교를 통해 성서의 창조이야기가 창조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살 대 나오게된 신앙임을 설명했다.

이러한 입장은 전통적인 성서해석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서 만일 이러한 시각을 가지면서 기독교인으로 살 수 있다면 나는 훨씬 편한 마음으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것같았다.

따라서 나는 오선생의 설교를 듣는 순간 나는 ‘아, 내가 지금까지 찾았던 분이 바로 저분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온 몸이 저릿저릿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뒤 나는 오재식선생을 찾아가 ‘나를 지도해달라’고 간청했다.

이때 오재식 선생이 내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에서 활동할 것을 권했고, 이로써 나는 드디어 기독학생운동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

KSCF는 KSCM(Korean Student Christian Movement)과 YMCA가 합쳐서 만들어진 곳으로 그 뒤 진보적 기독학생의 모체가 된 단체다. 실제로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를 포함해 26명의 KSCF 회원들이 감옥에 갔었다.

그해 겨울 열린 KSCF 겨울대회에 가서 나는 그 뒤 우리나라 진보 기독교계를 이끌게 되는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김용복박사(전주한일신학교 총장)를 만났고, 당시 나와 같은 학생이었던 박종렬(길지 발행인), 이시재(환경운동연합회 정책부위원장, 성신여대 사회학과교수) 등을 만났다.

특히 이 가운데서도 김용복박사(당시 나이 32세)는 내게 진보적 기독교신학을 처음으로 소개해준 분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운동의 한가운데서 갈등하고 있던 내게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그제서야 모든 해답을 얻은 것같았다.

‘아! 나도 사회참여를 하면서도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내가 그토록 찾았던 진리가 바로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이었구나...’

그리고 이 믿음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다시 복음주의 신앙으로 되돌아오기까지 나를 지탱해준 큰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