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1-12 18:50
   <스웨덴에서 배우는 교훈>에서 <분열에서 합일로, 파괴에서 창조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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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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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서 배우는 교훈


나는 일본을 보면서 항상 ‘일본이 공룡같은 나라’라는 생각을 한다. 몸뚱이는 엄청나게 큰데, 머리는 조그만한 공룡과 같은 나라, 다시 말해 일본이 경제적으로는 강대국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약소국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일본은 아직도 2차대전 뒷처리조차 제대로 못해 동남아 여러국가들의 원성을 사고 있으며, 세계 제1의 경제대국임을 자랑하고 있으면서도 인류를 위해 쓰여 지고 있는 일본의 돈은 너무나 약소하다.

때문에 사람들이 일본을 존경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각국으로부터 ‘경제동물’이란 비아냥을 받고 있다.

이런 일본의 경우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만약 우리가 경제성장을 이루어 세계에서 몇째가는 경제대국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만약 일본처럼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경제동물’이란 비아냥이나 받아야 한다면 과연 무슨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우리사회의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이제 한편으로 우리가 경제대국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떻게 하면 정신대국, 문화대국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정신대국, 문화대국이 된다는 것은 인류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서고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민족이 되는 것을 말한다. 환경문제, 빈곤문제, 기후의 변화 등 인류에게는 해결해야할 문제가 쌓여 있고, 우리도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도적으로 앞장서야 한다. 그럴 때에야만 정신대국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농민문제, 노동문제 등 얼마나 많은 문제가 남아 있는데, 지금 외국에 눈을 돌릴 여유가 어디 있느냐”

하지만 나는 ‘이처럼 인류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해나갈 때 우리사회의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제는 모든 모순이 세계화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여기서 목재가공산업을 키우면 키울수록 적도의 나무를 베어야하고, 공업을 발전시킬수록 에너지 소비를 늘려야하며, 이산화탄소도 더 많이 배출시켜야 한다. 당연히 지구의 오염도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모든 문제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국내의 문제와 전세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갈 길을 찾아야만 비로소 우리 내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지구 전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이며, 이 지구 전체 문제의 해결에 우리가 앞장설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역할을 담당해야할 주체가 바로 시민사회의 건강한 힘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시민사회의 건강한 힘,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힘,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다.

나는 세상을 세개의 큰 영역으로 나눈다면 국가와 기업,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제3의 영역으로 시민사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대표는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국가적 이해관계에서 한발짝도 양보하지 못하는 것이 정부대표의 입장이다.

때문에 유엔과 같은 국제회의에서 환경문제, 빈곤문제로 선진국과 후진국의 이해가 엇갈리면 서로 한발짝도 양보하지 않아 결국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기업은 원래 이윤추구가 가능한 범위안에서만 행동하는 조직이다. 기업의 힘이 막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남은 희망은 시민사회밖에 없다. 시민사회가 추구하는 것은 사랑, 정의, 도덕, 양심, 인권, 평화, 봉사, 나눔 이런 것들이다. 이런 선한의지를 조직화하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인류를 구제할 수 있으며,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봐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 복지국가를 건설한 나라를 보면 바로 이런 도덕적이고 선한의지의 결집에 성공한 나라는 복지국가를 실현했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실현하지 못했다.

스웨덴은 민주복지국가로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나라다. 내가 스웨덴에 갔을 때 누군가에게 ‘당신들은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민주복지국가를 만들었는가’를 질문하자 그 사람들은 두가지 때문이라고 답변을 했다.

우선 하나는 강력한 노동조합의 존재였다고 한다. 노동조합이 사회민주당이라는 정당을 만들어 사회개혁을 과감하게 진행시킨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밖에 없었다면 스웨덴이라는 나라는 끊임없는 계급투쟁의 격전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스웨덴 교육이 밑받침이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스웨덴의 교육이 가진 자들에게 자기 것을 남과 함께 나누는 것이 참다운 행복임을 일깨워 주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스웨덴의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과 함께 손을 잡고 민주복지국가의 건설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나는 스웨덴 사람들에게 이런 의식이 없었다면 스웨덴이라는 나라는 유지가 불가능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 스웨덴은 사회주의 국가보다도 빈부의 격차가 적은 나라다. 가장 잘 사는 사람과 가장 못사는 사람과의 차이가 여섯배밖에 안된다.

그런데 이처럼 사회적 격차가 낮으면 기업들이 열심히 기업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인요인이 없어진다. 기업인들이 뼈빠지게 일해서 돈을 벌어 봐야 대부분 사회복지를 위한 세금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자연 활동의욕이 꺾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경제가 침체될 수밖에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기업인들의 사회복지세금을 적게 거둘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결과 복지수준은 떨어진다.

따라서 한나라가 복지수준을 높일 때엔 기업인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세금을 물려야만 기업활동의 의욕을 잃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중요한 기준으로 전제되곤 한다.

그런데 스웨덴은 높은 복지수준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그 이유는 스웨덴의 기업들이 탐욕적인 목적을 위해서라기보다 보람을 위해서 기업을 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기업인 정신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교육의 힘이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스웨덴의 교육이 건강한 시민사회를 만들었고, 건강한 시민사회의 힘이 결국 이윤추구보다 보람을 위해서 일하는 기업가 정신까지 만들어 냈다는 얘기다.

나는 일본이 경제대국임에도 정신대국이 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가 일본 시민사회의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은 관료사회와 기업은 강력한 힘을 갖고 있지만, 반면 시민사회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하다.

따라서 우리가 경제성장을 이루되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고 스웨덴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체제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가려면 건강한 시민사회의 등장이 필수적이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국가이기주의를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도 고민해야할 문제다.

두해 전쯤에 나는 앞으로 경실련이 지금의 경실련을 국내부로 하고 별도로 국제부를 두어서 국내, 국제부의 활동과 인적자원의 크기가 국내부와 동등할 정도로 키워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때 실무자들이 내 말을 듣고 황당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대부분의 실무자들이 그때의 내 이야기를 황당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앞으로 경실련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국제부를 만든 뒤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 국민들이 자신의 것을 제3세계 사람들과 나누는 그런 의식을 갖게 할 수 있을까를 골똘하게 생각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단일민족으로 살아온 탓에 솔직히 민족적인 배타의식이 너무 강하다. 한마디로 우리밖에 모르는 민족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화교들도 뿌리내리지 못했고, 혼혈아들도 심한 차별에 시달린다. 외국에 나가서도 LA한흑폭동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민족과 계속 갈등을 일으켰다.

따라서 이제 우리도 우리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온 인류가 다 잘사는 사회가 만드는 데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우리 것을 우리보다 가난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위해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이 확산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이 내가 경실련 국제부를 통해 베트남돕기운동, 북한동포돕기운동, 해외한민족청년회 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편 이유다.



통일되면 내걸 나눠줘야 하잖아요


재작년에 중학교 2학년인 아들 기준이가 다니는 대치중학교(?)에서 학부모의 자격으로 1일교사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통일문제로 수업을 했는데, 먼저 학생들에게 ‘통일을 원하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손을 드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러면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손을 들어보라’고 했더니 두배 정도의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깜짝 놀란 내가 ‘너희들은 왜 통일을 원하지 않니?’하고 물어보고 한 명에게 그 이유를 말해보라고 했더니 그 학생의 말이 ‘우리는 잘 살고 북한은 못사는데 통일이 되면 우리 것을 북과 나누어야 하지 않느냐. 그래서 통일되는 게 싫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어린 학생의 발언 내용도 놀랄만한 것이었지만, 결국 그 학생의 말은 강남 중산층들이 갖고 있는 속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3년 전에 내가 연변에 갔을 때 조선족 젊은이들과 통일 문제를 주제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토론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조용히 내 옆에 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저는 남한 사람들이 통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그사람이 답한 내용이 더 가슴을 아프게 때렸다.

“지금 남한과 조선족의 경제적 격차는 하늘과 땅 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한에 가서 2년간 불법취업을 해서 돈을 모아 연변에 돌아오면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생기지요. 그런데 북한 사람들의 경제적 수준은 이런 우리 연변 조선족들과 또 하늘과 땅차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연변 친척에게 왔다가 돌아갈 때는 구멍난 양말 쪼가리까지 챙겨서 한 짐을 들고 되돌아 갑니다. 그런데 남한 사람들이 몇 명 되지도 않는 우리 연변사람들을 손톱 밑의 때 만큼도 동포애를 느끼지 않는데, 우리들보다 훨씬 많고 우리보다 훨씬 못사는 북한 동포인들 제대로 돌보겠습니까. 우리는 남한이 통일할 마음도 없지만, 통일할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두가지 경험을 통해 느낀 점이 참 많았다.

나는 그동안 우리사회가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통일’문제라고 생각해왔다. 통일의 과정을 원만하게 넘어가면 선진국의 과정을 향해 쾌속 질주하는 것이고, 이것이 잘못되면 우리는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만다는 생각이다.

또 통일문제는 이제 더 이상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눈 앞에 닥힌 현실의 문제이며, 그것을 풀어가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는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왜냐하면 통일 문제도 따지고 보면 나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독일통일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현재 통일 독일의 가장 큰 문제는 동독의 주민은 서독의 물질수준까지 올라가기를 원하지만 서독 주민들은 자기 것을 동독주민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통일까지 도달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가 훨씬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나는 우리나라가 통일 되었을 때에는 독일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과 우리 것을 훨씬 안나눌 것이라는 생각인데, 그 이유는 우리 국민들이 그동안 나눔 운동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앞에 나오는 중학생과 연변조선족의 발언을 봐도 우리 내부에 ‘북한동포들과 우리 것을 나누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적은가를 알게 해준다.

지금 우리는 국민소득 만불을 넘어 선 선진국의 문턱에 선 나라다. 그런데 북한은 지금 국민소득이 고작 7백불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최빈국의 수준이다.

따라서 지금은 통일운동을 펴나가는 데 있어 무엇보다 북한동포를 돕는 운동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도 한두해 돕다가 그만 두는 식이 아니라 통일이 될 때까지 북한돕기를 계속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우선 남북한 간에 불신을 해소하고 우리가 같은 동포라는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럴려면 우선 우리 국민들 사이에 우리 것을 북한 동포와 나누려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북한 문제에 관한한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은 둘로 나뉘어져 있다. 조문파동 때 드러난 것처럼 우리 국민은 통일문제에 있어 보수 진보로 완전히 나뉘어져 있다.

숫자로 따지면 보수측이 훨씬 많다. 보수측이 이만큼 커지게 된 것은 이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그만큼 북한의 김일성 체제가 그 동안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 보수세력의 주류가 누구냐면 이북출신이다. 이들은 대부분 김일성을 피해 내려온 사람들인 탓에 김일성 부자에 대한 증오가 매우 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은 북에 두고온 고향과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고향돕기를 하자고 하면 가장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들 이북출신 사람들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 동포돕기 운동은 우리사회의 보수세력을 화해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때문에 나는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은 진보세력이 앞장서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보수적인 반공 세력이 앞장서서 이 운동에 앞장서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몇 가지 경험을 통해 이 사람들이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을 갖고 ‘북한동포돕기운동’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확신했다.

경실련에서 북한 슬라이드 쇼를 한적이 있는데, 이때의 경험이 그것이다.

이때 경실련 어른들이 몇 분 오셨는데, 이분들은 평상시엔 김일성에 대한 적개심이 굉장히 강하신 분들이었다. 그런데 이분들이 슬라이드를 보고나서 ‘북한을 도와야겠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 슬라이드 쇼에 나오는 북한동포들의 참상이 아마도 그 분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같다. 예를 들면 슬라이드 가운데에는 추운 2월에 압록강꼭대기에 있는 의주에서 아줌마 두사람이 걸어가는데, 한 사람의 발 뒤꿈치를 자세히 보니 맨발이었다.

또 다른 사진에는 국민학교 여학생들이 두줄로 서서 걸어가는데, 한 아이는 신발을 한쪽만 신고 한쪽은 맨발이고, 다른 아이는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사실 나는 미국에 있을 때 북한의 상황을 웬만큼 들었는데도 그 슬라이드를 보자 목이 메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통일이니 좌우이념을 논하기에 앞서 우선 북한 동포들을 기아선상에서 구해내는 것이 필요하다.

10년뒤나 30년뒤쯤에 자손들이 우리에게 “당신들의 국민소득이 1만불을 넘어서고 북한이 7백불도 안되었을 때 북한을 돕지 않고 무얼 하고 있었는가. 북한의 어린이들이 신발이 없어 동상에 걸리고 북한의 아낙네가 추운 겨울에 맨발로 다닐 때 남한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우리는 떳떳하게 후손들을 대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돕기운동은 모든 것에 앞서 거대한 국민운동으로 등장해야만 하는 것이다.

남북대화는 정부에게 맡기고 경협은 기업에게 맡겨 두면 된다. 그러면 때로는 싸우기도 하고 냉전도 벌이고 협력도 하면서 각각 알아서 해나가면 된다. 민간이 해야 할 일은 동포애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처럼 동포애를 발휘하는 운동이 먼저 이뤄지지 않으면 통일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가 없어 통일의 과정이 격렬한 대혼란의 과정이 되어 버리고 만다. 따라서 우리쪽 사람들에게 북한동포를 사랑하는 마음, 자기 것을 남에게 나눠 주는 ‘나눔의 정신’이 가득차야만 통일의 과정이 순탄할 수 있다.

내가 이런 북한돕기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꽤 오래전부터다. 그러다가 재작년에 경실련에 통일협회를 만들어 시작했다.

경실련이 통일운동을 한다고 발표하고 얼마 뒤 문익환목사님이 석방이 되었는데, 그 즈음에 문목사님이 나를 만나자고 하셔서 댁에 찾아갔던 적이 있다.

그랬더니 문목사님이 “경실련에서 통일운동을 한다는데 생각이 어떤지 듣고 싶다”고 하시길래 내가 이렇게 답변했다.

“저는 지금 북이 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지금 망한다면 수많은 난민이 한국으로 내려올테고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나는 북한돕기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운동을 재야 통일운동 세력이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이운동이 마치 북한의 체제를 지지하는 운동으로 오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민들이 이 운동이 북한의 체제를 돕는 것이 아니라 북한동포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인식하기 위해서는 저처럼 통일문제에 관한한 보수성향인 사람이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랬더니 문목사님께서 무릎을 치시면서 “나도 기회가 되면 서총장을 만나서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경실련이 그런 일을 좀 해주었으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총장이 먼저 그런 얘기를 해주니 너무 반갑고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실제로 문목사님은 그 뒤 경실련 회원들에게 ‘북한돕기운동을 열심히 하기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주시기도 하셨다.

내가 북한돕기운동을 할 때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가 북한을 도울 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남한에서 준 물건이라는 것을 우리가 떠들썩하게 선전하면 북한당국이 체제불안을 우려해 북한동포들에게 그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을 가능성도 많기 때문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북한에게 물품을 지원했다가 그게 군수물품으로 쓰이면 어떻게 하나’라는 우려를 하기도 하는데, 이런 점도 비형간염백신, 비타민, 설탕 등 군수품과 별 상관없는 물품을 지원하면 해결된다. 북한 사람들의 1/3이 간염에 걸려 있는데도 백신이 없어서 치료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나는 적어도 누군가가 이 일을 적어도 10년간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그일을 맡을 생각으로 경실련에 통일협회를 만들고 이 일을 준비했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정치에 들어오게 되면서 사실 이운동도 크게 차질을 빚게 될 것같아 마음이 무겁다. 한편으로는 정치개혁의 임무도 중요하지만,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한 통일운동을 본의아니게 중단해야 했던 아쉬움도 있다.

지금 기독교, 불교, 카톨릭 등 종교단체들이 이 불씨를 이어받아 수재민돕기운동을 지속적으로 펴고 있으나, 애초에 내가 구상했던 거대한 국민운동으로 커나가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때문에 비록 나는 지금 그일을 계속 추진하지 못하지만, 다른 훌륭한 사람이 대신 그 운동을 국민운동으로 키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베트남 돕기의 참 의미


나는 우리가 선진국이 되었을 때 다른 민족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 것을 남과 함께 나누는 그런 민족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과 나누는 일은 우리가 선진국이 된 뒤에 시작해야 할 일이 아니라 국민소득 만불이 넘은 지금부터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해 2월 말에 코펜하겐에서 사회개발 정상회의가 있었다. WSSD라고 하는데, 이 회의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ODA 자금(제3세계를 돕는 정부의 지원기금)을 0.7%까지 인상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진국들 모두가 자기나라 GNP의 0.7%를 가난한 나라를 위해서 쓰자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GNP의 0.7% 정도를 가난한 나라를 위해 쓰는 나라는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네덜란드 등 몇개 나라에 불과하다. 이런 나라들은 거의 1%를 제3세계를 위해 쓰고 있어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ODA자금으로 GNP의 0.04%를 쓰고 있다. 때문에 나는 이 비용을 0.1%까지라도 인상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그러나 실제로는 금년도 예산에서도 전혀 인상되지 않았다. 총액대비로 20%만 인상되었을 따름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절대로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가 없다. 만약 정부가 OECD에 가입하려고 해도 최소한 GNP의 0.3%를 ODA자금으로 써야 한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가입신청을 해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조만간 ODA의 비율을 적어도 0.3%까지 올려야 할 부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정부가 국제적인 체면 때문에 그것을 올리고 싶어도 국내의 반대여론 때문에 올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국내의 여론이 ‘국내에 써야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제3세계 도울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반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의 ODA자금은 언제나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 안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고 돈을 써야할 사회복지분야도 많다.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제는 ‘제3세계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도 우리의 형제다’라는 의식과 철학을 갖는 국민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하고, 경실련과 같은 시민운동단체들이 앞장서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갖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제3세계를 도울 것인가를 고민했다. 우선 대상국을 정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여러 나라를 둘러 본 뒤 베트남을 대상국으로 정하고 구체적인 실행에 들어갔다.

베트남을 선정한 이유는 우선 베트남은 우리에겐 특별한 나라라는 점이다. 한국에서 제일 가까운 최빈국이면서도 지난 날 월남전으로 많은 빚을 진 나라이고 요즈음 한국기업이 아주 활발하게 진출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남의 사회개발경험은 앞으로 북한의 사회개발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뿐만아니라 우리는 베트남에서 단지 지역사회개발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베트남의 지도층과 광범위한 교류를 통해 한국의 경제개발경험을 바르게 전달하는 일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하나의 모델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형 경제발전모델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베트남 지도층에게 제대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우리는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약 30분 정도 떨어진 하타이라는 지역을 선정했다. 하타이지역은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 부근의 극빈 농촌지역으로 약 2천여가구에 7천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주업이 쌀농사이며 GNP가 80불 정도로 베트남 내에서도 가난한 농촌이다.

우리가 이곳에서 펴고자 했던 중요사업은 농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신용조합을 통해 농가에 금융지원을 해주는 것과 직업훈련원을 건립해 주민들에게 직업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 등이다.

사실 이 베트남 계획도 내가 경실련 사무총장을 그만둔 뒤 경실련 국제부를 통해 오랜 시간 동안 온 힘을 쏟아 키워보고 싶었던 사업이었는데, 정치권에 들어오게 되면서 도중에 손을 놓게 되었다.

그리고 한동안 답보상태에 빠졌었는데, 그 뒤 다행히 충무 경실련 공동대표로 있는 강명덕변호사가 베트남사업을 추진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지금 계획을 구체화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해 경실련이 제3세계국가 돕기운동의 일환으로 베트남사업을 하고자 한다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나간 뒤 많은 분들이 후원자로 나섰는데, 그 가운데 박양수라는 분이 있었다.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전화를 걸어 왔는데, 나이를 물어 보았더니 마흔이 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조건으로는 베트남 사업의 실무자가 되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연락을 하지 않았었는데, 이분이 내게 찾아와 “자신은 학교공부를 하지 못했고 많은 고생을 한 사람이지만, 이제는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있다. 하지만 그러고 나니까 옛날 어린시절 뼈빠지게 고생하던 시절이 자꾸 생각이 나서 남은 인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서 보내고 싶다”면서 자신을 베트남으로 보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계획안을 가지고 와보시오”했더니 베트남에 목재가공훈련원을 세우자는 말을 했다. 대략 25개 종류의 기계를 전부 배치하면 그게 일련의 공정이 되므로 어떤 물건이든 생산할 수 있는 목재가공공장이 된다는 말이었다. 기계를 구입하자면 1억5천만원 가량이 들지만, 우리나라 가구회사들이 기계의 질을 높이면서 그런 구형기계들을 창고에서 썪히고 있으므로 기증을 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말을 듣고 내가 박씨와 함께 베트남에 가서 하타이성의 부성장을 만나서 그 계획을 이야기했더니 우리에게 약 만평 정도의 땅을 주었다. 훈련원을 세울 땅이 확보된 것이다.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보니 한편으로 ‘과연 이일을 성공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그 훈련원에서 노동자들을 1년쯤 가르치고 나면 이 노동자들이 기술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 이 기술자들을 한국에서 취업하도록 주선한다. 우리나라는 기술을 가진 노동인력이 부족해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베트남의 노동자들을 싼 임금에 살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아무리 싼 임금을 받더라도 그 돈은 베트남 현지 월급보다는 거의 10배 가량 되는 큰 돈이다. 따라서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에 와서 한달에 적어도 40만원 정도를 저축을 할 수 있고, 2년간 취업하면 한사람이 약 1천만원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다.

그리고 그뒤 베트남으로 돌아가 10명 내지 20명이 한 팀이 되어 목재가공회사를 차릴 수 있다. 지금 베트남에는 기계로 목재를 가공하는 회사가 전혀 없어 모든 걸 손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베트남도 점점 공업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기계로 가공하는 목재산업이 반드시 필요한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따라서 경실련이 세운 목재가공훈련원이 그 분야를 완전히 독점할 수 있게 되고, 앞으로 10년 내로 이 목재가공 직업 훈련원이 사실상 베트남 전지역의 목재가공업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장악한다는 자본으로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원 출신들이 힘을 모아 회사를 차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베트남 사람들이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뒤에도 임금노동자로 전락하지 않고 스스로 기업주가 되어 생산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말하자면 생산자들이 공동으로 소유하는 기업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기업운영하는 법을 가르쳐주면서 노동자들에게 더불어 사는 정신교육을 실시해 그들의 수입 가운데 1/10은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쓰도록 의무화하는 정신을 키워낸다면 베트남의 현재 사회주의적 공동체문화를 경제발전을 이루는 과정에서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렇게 되면 이활동이 베트남의 경실련이 되어 경실련운동을 세계에 수출하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경실련이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서는 시민참여를 통해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추구하지만 사회주의 국가에선 그곳의 풍토에 맞는 생산자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경제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다른 점이다.

만약 이 운동이 성공을 거두면 다음 단계로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이 운동을 전개하고 궁극적으로는 북한에 들어가 생산자협동조합운동을 만들어 낼 수 있다.따라서 베트남지원사업은 단순히 제3세계를 돕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우리민족의 구원과 관련되어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있다.

또한 나는 경실련의 베트남 진출은 단지 경실련 뿐만아니라 다른 시민운동, 학생, 지식인 등 많은 사람들이 제삼세계로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도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경실련 대학생들이 여름에 베트남으로 배낭여행을 떠나 제삼세계의 민중들에 대한 봉사활동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은 학생운동에 또하나의 새 장을 여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베트남 사업은 단순히 우리가 베트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젋은이들에게 산교육장을 제공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경실련의 베트남진출은 좀 사치스러운 일일런지도 모른다. 산적한 국내의 개혁과제를 앞에 두고 무슨 뚱단지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는 제삼세계 사람들의 고통과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같은 비중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경제정의를 이야기할 때 단지 남한에서의 경제정의만이 아니라 한반도의 차원에서, 그리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동시에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뿐만아니라 세계의 문제와 씨름하려면 장기적인 준비과정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고 역량을 키우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시민사회의 역량을 크게 키우는 길만이 환경위기등 地球적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는다면 시민사회 또한 기업과 마찬가지로 10년, 15년 앞을 내다보며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화는 한민족공동체의 육성으로부터


나는 미국에 사는 동안 재미한인교포사회의 문제와 고민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진 경험이 있다. 대부분의 교포 1.5세, 2세들이 비록 언어장벽은 사라졌지만, 자신들이 미국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알고 좌절하고 고통받는 모습을 그 당시 참 가슴아프게 지켜 보았다.

그런데 경실련 3년째경에 오사카 재일교포청년단체들의 초청으로 그곳에 가서 경실련운동을 설명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재일교포청년들의 고민을 들을 기회도 갖게 되었다. 이 단체는 과거에 한국의 재야운동과 연대해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지원하는 일을 열심히 해왔던 단체였다.

이들은 과거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문제가 심각했던 때는 제일교포 청년운동도 굉장히 활발했다고 말했다. 자신들도 무언가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재일교포들에 대한 차별이 심각한 것도 오히려 운동을 활성화시켰다.

그런데 일본사회에서 비록 한국민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차별이 상당히 줄어들고, 또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을 지원할 필요도 없게 되자 교포 청년운동조차도 상당히 시들해지고 침체하는 과정을 겪고 있다는 말을 내게 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제는 반독재, 분단, 이민족에 대한 차별과 싸우는 운동, 반대하는 운동으로는 더 이상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무엇을 성취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는 중진국을 넘어서 선진국의 문턱에 와있다. 앞으로 10년,15년뒤면 세계에서 몇째 안가는 경제대국이 될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 해외에 흩어져사는 우리 교포들이 차별을 당하고 살일이 없어질 것이므로 오히려 이제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 세계 사람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선진국이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리 것을 어려운 사람들과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에 앞서 우선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우리 한민족 공동체를 지원하고 돕고 함께 나누는 일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들려 주었다.

실제로 과거에는 국적이 중요했다. 말하자면 어느 나라 사람인가가 중요했다.하지만 이제는 전세계가 달라지고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사실 국경이라는 장벽이 점점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제는 어떤 국적을 갖고 있느냐보다 오히려 어떤 민족이냐, 어떤 언어를 쓰느냐, 어떤 문화를 갖느냐가 훨신 중요한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국적을 가진 한국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국적이건 일본국적이건 러시아시민이건 중국시민이건 간에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 전체의 공동체를 키워가고 육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그들에게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스무살에서 서른살 이내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두주일간 생활을 같이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자. 그러면 프로그램을 통해 교포청년들이 우선 서로 굉장히 가까와질 것이고, 해마다 프로그램을 열면 4~5년 뒤에는 4~5백명의 교포 젊은이들의 네트웍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네트웍이 앞으로 한민족공동체를 육성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재일동포 젊은이들의 꿈과 비전을 이런 활동에 쏟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그랬더니 그 청년들이 굉장히 열광적으로 반응했고, 그 다음해 봄부터 세계한민족청년대회라는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번 째 대회는 소련, 중국, 한국, 미국, 독일, 브라질, 일본 등 7개 나라의 20~35세의 젊은이들을 1백명쯤을 모아 연변에서 한주일, 한국에서 한주일씩 두주일을 함께 지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비용은 몇몇 기업들에 우리의 계획을 설명했더니 선뜻 재정을 지원해줘 의외로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교포청년들이 함께 백두산도 올라가고, 고구려, 연변도 구경하고, 한국에 와서 경주, 포철, 대우자동차공장도 구경하고, 세미나도 열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서로 굉장히 친해졌는데, 그 때 이 청년들이 놀라운 경험 하나를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서로 만나서 같이 생활해보자 서로의 생김새가 똑같아 명찰을 보지 않으면 각자가 어디에서 온 교포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는데도 각자의 이름이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는 점이 준 충격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은 바로 이 한민족공동체에 속하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이 경험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소중했다는 말을 행사가 끝난 뒤에 그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교포청년들에게서 많이 들을 수 있었다.

1차 프로그램이 성황리에 끝나자 일본의 교포청년들이 다음 해에는 자신들이 주최를 하겠다고 해서 김광남이라는 분이 앞장서서 재작년에는 한주간은 일본에서 한주간은 한국에서 보내는 일정으로 두주간 행사를 진행했다. 물론 이 행사도 1백여명의 교포청년들이 참석해 성공적으로 치렀다.

이때에는 캐나다 스위스에서도 교포 청년들이 왔는데, 스위스에서는 어릴 때 입양된 한국인입양아가 왔다. 그 때 스위스입양아는 이곳에서 어머니를 찾는 충격적인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 다음 행사는 지난 해 7월 미국의 LA에서 열렸는데, 모두 9개 나라에서 참석했다. 이번에는 LA에서만 8일간 열렸는데, 한국인입양아들이 많이 참석했다. 그리고 지난 해 12월 LA에서 세계한민족공동체(Grobal Korea Network)라는 조직이 정식으로 출범했다. 대표는 카나다의 이상철 목사가 맡고 내가 부회장을, 그리고 사무총장은 일본의 사람이 맡았다.

나는 이밖에 지난 해 5월경에는 독일의 뒤쉘도르크에서 유럽지역 입양청년대회를 개최했던 적이 있는데, 이때는 나 스스로도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나는 두번째 한민족청년대회에 참여했던 스위스입양청년을 통해 유럽의 각 나라마다 한국입양청년들의 조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럽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들에게 연결하는 일을 하다가 독일의 한민족공동체에 속해 있던 김동욱목사에게 한국입양아청년대회 프로그램을 조직하면 우리가 재정지원을 하겠다고 제안해 행사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행사에는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벨지움, 네덜란드, 스위스 등에서 약 50명의 입양청년들이 모였는데, 나는 그자리에서 이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고향인 한국의 문화, 언어 등을 알고 싶어 하며 우리가 그들을 얼마나 방치해왔는가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내게 “한국말을 너무 배우고 싶었지만,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부모를 찾고 싶어 한국에 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아예 내 어린 시절 기록조차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어릴 때 부모들에게서 한번 버림을 받고,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이라는 나라로부터 또 한번 버림을 받는다”며 눈물로 호소했다.

나는 이말을 들으면서 ‘이들을 피부색이 다른 먼 이국으로 입양을 보내놓고 모른 척하는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하는 생각에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한번은 독일교포사회 여전도회 회원들이 김밥, 송편, 인절미 등을 준비해온 적이 있는데, 이들이 인절미를 보면서 ‘이게 뭐지? 참 맛있다’며 신기한 표정으로 먹는 것도 보면서도 이들이 얼마나 한국문화와 단절된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느끼고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현재 유럽에는 교포입양아가 5~7만명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이처럼 방치되어 있다. 사실 입양청년이야말로 우리 한민족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이며, 우리나라가 세계화를 이뤄가는 데 중요한 인적 자원이다. 홍보역할을 할 수도 있고, 우리 기업의 소비자가 되기도 하고 그 지역의 정보를 제공하는 정보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처럼 중요한 인적 자원을 아무렇게나 방치해왔다.

유럽입양아대회가 끝나고 난 뒤 참석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유럽지역한민족공동체(Europe Korea Network)를 만들었다. 현재 조직원이 1천명에 이른다. 이들은 올해 유럽에서 약 5백명에서 1천명이 모이는 3박4일 대회를 치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 중이다. 지금 이 행사를 통해 한국문화를 전혀 경험하지 못한 입양청년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리고 입양아로서 겪었던 자기정체성에 대한 갈등을 서로 나누고 부모들과의 토론 자리도 갖겠다며 의욕에 넘쳐 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들에 대한 관심을 좀더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유럽입양아대회를 열면서 독일주재 대사에게 축사를 해달라고 했지만, 아예 오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한국의 외무부가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외무부사람들에게도 매우 유감을 갖고 있다. 외무부 관리들은 근본적으로 입양아는 국적상 유럽사람이니까 우리가 도와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자칫 관계를 맺었다가 잘못해서 외교문제가 발생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생각이 입양아들을 도와주어야 겠다는 생각보다 앞서고 있다.

따라서 나는 해외교포들의 문제는 외무부와 떼어 놓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교민청과 같은 별개 부서를 만들어 교포사회의 활성화, 민족문화를 유지하는 일을 지원해야 한다.

경실련에서 한민족청년대회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사실 경실련이 재정적으로 굉장히 어려울 때였다. 때문에 내가 이 프로를 하려고 하자 불만을 가진 회원들도 꽤 있었다. ‘경제정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당장에 시급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나는 시민단체도 기업처럼 10년,15년을 바라보면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해외한민족공동체를 육성하는 일은 젊은이들에 대한 투자, 말하자면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지금 젊은이들의 조직을 만들어줌으로써 10~15년 뒤에는 우리민족의 장래에 엄청난 기여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는 교포청년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 줄 수 있다.



아시아태평양 시민사회포럼의 원대한 비전


94년에 제네바에 가서 세계교회협의회(WCC) 주최의 시민사회 워크샵에 두번 참석하면서 나는 ‘이제 전세계적으로 시민사회의 시대가 도래했구나’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과거에는 전 세계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대부분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었지만, 이제 그시대가 지나가고 시민사회의 도덕적이고 양심적인 힘을 키워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모든 나라에서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프로그램에 참석하면서 다른 나라의 많은 시민운동가들이 우리나라의 경실련을 시민사회의 힘을 키우는 성공적인 모델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 이 WCC 프로그램에서는 각 나라의 시민사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면서 이제 시민사회에도 전세계적인 네트웤에 필요하다는 내용의 의견이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내게 시민사회의 국제연대조직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예컨대 국가와 기업이 있지만, 이들은 결국 자국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밖에 없으므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시민사회가 나설 수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제적인 연대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프로그램에서 이런 연대조직의 모델로 아시아지역의 여러 민중단체들의 연대조직인 일본의 PARC라는 단체의 사례를 보여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저것은 아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각 나라의 시민단체가 연대해서 큰 힘을 만들려면 우선 힘있는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사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세력들이 연대하게 될 때 그힘이 극대화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급진적인 재야단체들의 연대만으로는 이처럼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가 없다. 때문에 그힘도 굉장히 미미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나는 한걸음 나아가, 시민단체만의 힘만으로도 이런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시민사회와 각 나라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함께 연대할 때에야만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조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한국의 경우로 보자면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운동단체와 김수환추기경, 송월주스님, 강원룡목사 등의 정신적 지도자들이 함께 결합해야만 엄청난 도덕적 파워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WCC의 시민사회 세미나프로 책임자인 이스라엘 바키스탄목사가 내게 “95년 1월에 멕시코시티에서 시비쿠스(civicus)라고 하는 세계 시민사회연대조직이 창립대회를 하니까 그곳에 참석해보라”는 권유를 했다.

그래서 나는 “시비쿠스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줄지도 모르겠다”는 굉장히 흥분된 마음을 갖고 지난 해 1월 시비쿠스 창립대회에 참석했다. 그 행사는 전 세계에서 3백명 정도의 시민사회리더들이 모이는 거대한 행사로 3박4일 동안 치러졌다. 그러나 나는 그 대회에 참석하고 난 뒤 굉장히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첫째, 그 대회가 미국의 몇몇 시민단체들이 몇몇 재단의 재정지원을 받아 전 세계 시민단체 대표들을 초청해서 끌어 모은 것에 불과할 뿐 자발적인 연대조직이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한 마디로 돈으로 만들어낸 조직이었고, 이런 까닭에 참가자들의 열정적인 참여가 보이지 않았다.

두번째로는 록펠러재단, 포드재단, 히다찌재단 등 재단이 주도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약했다는 점이다. 시민단체가 주도하는 행사를 재단에서 재정지원을 해준다기보다 오히려 기업의 재단들이 주도하는 행사를 시민사회가 보조해주고 있는 형태에 가까왔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시비쿠스가 시민사회의 국제적 연대의 희망이 될 수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때문에 나는 거기서 돌아오면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적인 조직을 만드는 일을 시작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우선 아시아태평양지역 시민사회 연대조직부터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나는 새로 만드는 연대조직의 구성은 각 나라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와 대표적인 정신적인 지도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만들어 나가는 프로그램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선 재정을 마련할 목적으로 우리나라 정부에 광복50주년 기념사업 프로젝트를 내고, 재정을 따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압력을 다 가했다. 정부에 나름대로 로비활동도 폈고, 이홍구총리를 만나 자세한 계획에 대한 설명도 했고, 이 계획을 꼭 들어 주어야 한다는 내용의 강경한 어조의 공문도 보냈다.

실제로 광복50주년기념사업에 한국정부가 수백억원의 돈을 쓰지만, 민간주도사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아시아태평양포럼같은 국제시민사회운동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부에서도 내 설명을 듣고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그 뒤에 예산의 여유가 전혀 없다며 어쩔 수 없다는 전갈을 보내와 기업에 재정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삼성전자와 포항제철을 접촉했는데, 그 이유는 이 기업들이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가 주는 경제정의수상기업들이기 때문이었다. 수상기업들에게 이처럼 소중한 이벤트에 재정지원을 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기업들도 이런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재정이 마련된 뒤 나는 지난 해초 필리핀에 가서 필리핀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에디쇼리델라또레 신부와 이문제를 협의했다. 델라또레 신부는 마르코스정권 시절 산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잡혀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신화적인 인물로 아키노정권이 들어선 이후 온건노선인 시민민주주의의 노선으로 전환해서 시민운동에 몸담고 있는 분이다.

그분은 한국에 올 기회가 생기면 경실련을 꼭 방문할 정도로 경실련운동에 대한 이해와 지지가 깊은 분이기도 하다. 그분에게 내가 갖고 있던 아시아태평양지역포럼에 대한 구상을 이야기했더니 그분도 내 의견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며 자신도 그 포럼에 참석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 뒤 나는 필리핀의 농촌재건운동회장인 코레이시오모랄레스, 마가렛셀 세게자원협회회장 등과도 이 문제를 협의했다. 이들은 모두 시비쿠스를 창립한 사람들이다. 당시 아시아태평양지역에는 연대조직이 없었기 때문에 시비쿠스를 통해 연대조직결성 경험이 있는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도 내 의견을 듣고 적극적으로 찬성을 했다.

이렇게 해서 세차례의 준비회의를 거친 뒤 지난 해 8월 10일부터 14일까지 2박3일간 한국에서 드디어 아태포럼을 개최했다. 이 행사에는 한국, 일본, 대만, 홍콩, 버마,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타일랜드,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피지, 방글라데시, 네팔 등 아시아태평양지역의 22개 나라에서 온 80여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는데, 이 가운데 15명 가량이 정신적 지도자들이었다. 이홍구총리의 특별강연도 있었고 외국에서 온 대표들의 청와대면담도 있었다.

행사는 엄청난 성공이었고 모인 사람들 모두가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리고 이 자리는 한국의 시민운동이 아태지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시민운동으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확인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는 이 행사 마지막날에 아태포럼의 사무총장으로 뽑혔다.

행사를 폐막하면서 내가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지금 인류의 문제가 너무나도 심각합니다. 그리고 이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과제가 우리 시민사회의 어깨 위에 짊어져 있습니다. 이과제를 잘 이행하려면 시민사회의 국제적 연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아태포럼이 그것의 출발이 될 것입니다”며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나는 이일이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앞으로 몇해 동안은 이일에 전념해야 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런데 6.27지방선거가 끝나고 뜻하지 않게 정치권에 들어오게 되면서 이 일에서도 손을 놓게 되어 아쉬운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다.

지난 해 11월에 태국에서 2회행사를 위한 준비회의가 있었는데, 개혁신당작업 때문에 가지 못했고, 사무총장직은 필리핀사람이 내 대신 맡게 되었다. 올해에는 방글라데시에서 2차회의가 있을 예정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가지 위안을 받는 점은 내가 구상한 아태포럼이 한번의 행사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단순한 시민단체들만의 연대가 아니라 정신적 지도자들이 함께 연대해야 시민사회의 힘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내 구상이 아태포럼을 통해서 관철되었고 모든 참가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아태포럼이 열렸을 때 아시아태평양지역 이외에도 유럽, 라틴아메리카, 미국, 아프리카에서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이들이 아태포럼의 성공적인 결과를 보고 ‘자기 대륙에서도 이와 똑같은 모임을 만들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다.

나는 실제로 아태포럼과 같은 꿈이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유럽, 아랍지역에까지 확대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되면 몇해 뒤에는 국가들의 연합인 유엔(United Nation)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국제연합인 유나이티드 시민사회국제연합(United civilsociety)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시민사회국제연합이 아마도 인류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있는 희망의 조직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분열에서 합일로, 파괴에서 창조로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 복음주의신앙으로 되돌아 오는 경험을 한 것은 내가 경실련을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경실련 활동을 하면서 손봉호교수님과 같은 분의 도움으로 복음주의교회 사람들과도 갈수록 관계가 깊어졌다.

한번은 내가 전주에 있는 합동측 교회의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말씀이 내가 경실련에서 하는 이야기와 꼭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보수교회 목사님들이 노동문제,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고 보수적이지만, 경제정의, 부정부패척결문제, 환경문재 등 민생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조금도 보수적이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의식개혁운동, 윤리실천운동 등에 있어서는 보수교회 분들이 훨씬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도 발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복음주의교회 젊은이들을 만나면 진보교회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보수교회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옛날 내가 대학시절 진지하게 고민하던 모습을 다시금 보는 듯해서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제 기독교운동의 주도권이 진보교회에서 보수교회로 넘어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여태까지 내가 가진 보수교회에 갖고 있던 선입견은 그들은 독재정권의 시녀노릇만하고 사회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개인의 안일만 추구하는 사람이다는 생각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이 기복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해 왔는데, 실제로 그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나는 그사람들이 나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진지한 기독교인이고 기복주의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이웃사랑을 실천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들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회참여를 할 것인가에 대한 노하우가 상당히 부족할 뿐이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보수교회와 진보교회가 하나가 되지 안되면 안되겠구나하는 생각을 절실하게 하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교회는 너무도 오랫동안 분열의 시대를 살아 왔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져서 서로 너무 다른 역사관, 신앙관, 사회인식, 국제관계를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이 두개의 교회는 서로 자기들만이 가장 옳은 기독교라는 입장을 확고하게 지켜 왔다.

50년대말 WCC의 용공성문제를 둘러싸고 시작된 한국교회의 분열은 그 후 군사독재시대가 시작되면서 서로 확고한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상호대립하는 모습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진보교회는 보수교회를 향하여 독재앞에서 침묵하고 있는 점을 비난하면서 우리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보장을 위해 많은 고난을 겪어왔다. 그런가하면 보수교회는 자기들만이 순수한 기독교임을 강조하면서 진보교회가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급진성을 띠고 있다고 비판하여 왔다. 그리고 복음전도와 선교활동에 전념하면서 기독교의 또다른 전통을 쌓아왔다.

두 교회의 거리가 너무도 멀었고 도저히 합쳐질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가 둘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 반성도 비판도 죄의식도 없이 살아왔다.

그리고 군사독재정권이 한국교회를 둘로 갈라놓았던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이러한 분열이 불가피하다고 자위해 왔다. 물론 이러한 불가피론이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이러한 분열의 원인들조차 다 사라지고 말았다.

우선 WCC의 용공성문제는 공산주의가 다 무너진 지금에 와서는 그야말로 원인무효가 되었다. 그동안 한국교회에 ‘저항이 아니면 침묵을 강요’했던 군사독재도 다 사라져버렸다. 이와 함께 논란의 대상이었던 이념적 사회운동도 사실상 소멸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보수교회와 진보교회의 내부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동안 보수교회는 민주화과정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고 성경적인 방식으로 사회참여를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경실련을 중심으로 한 시민운동에의 참여, 사랑의 쌀 운동, 공명선거운동, 정직.절제.사랑실천 운동 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진보교회도 지난날 정치적 저항에 몰두한 나머지 개인의 영혼의 문제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해 반성하고 영성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교회가 하나가 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준 사건은 CA-TV 인가문제이었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유독 개신교만 단일채널로 신청하지 못하고 계속 시간을 끄는 고통을 겪고서야 비로소 가톨릭,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 모든 종교가 하나의 단일한 기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개신교만 보수-진보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뼈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난 뒤 보수-진보의 분열이 얼마나 기독교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양심의 역할,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왔을 뿐만 아니라 교회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는 힘조차 가지지 못해 왔다. 그래서 아직도 가짜박사, 가짜목사, 무인가신학교문제, 금권선거등이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다. 교회가 분열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정화할 수 있는 영적 권위를 세울 수 없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재결합은 필연적이다. 환경문제의 해결이나 부정부패의 척결, 그리고 정의를 확립하는 일등이 소수의 진보적인 목소리로는 결코 될 수 없으며 한국교회 전체가 나서서 양심운동, 정직운동, 절제운동을 벌여야 한다.

통일문제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통일운동이 아니면 힘을 가질 수 없으며 우리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골을 메워 양자를 통합해 낼 수 있는 통일운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통일운동을 주도하려고 한다면 먼저 교회내부의 보수와 진보의 골을 메우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 보수교회는 성경적인 방식으로 사회참여를 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고 있다. 반면에 진보교회는 사회참여의 경험도 많고 사회운동가도 많은데 대중적인 지지가 약하다. 말하자면 물고기가 물을 떠나 있는 격이다.

물고기로 하여금 물로 되돌아 가도록 한다면 그동안 침체해 온 사회선교활동은 다시금 새롭게 큰 활기를 띠게 될 것이다.

때문에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지도자들을 만나면 진보교회와 복음주의교회가 서로 손을 잡고 일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해왔다. 4년전 쯤에는 보수와 진보와의 만남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가깝게 지내던 진보교회 목사들과 보수목사들이 함께 만나는 시간도 가졌다.

또한 내가 한기총에서 사회담당 협동총무로 일해 달라는 청을 몇차례 거절하다가 결국 한기총이 북한동포돕기운동에 앞장서겠다고 해서 총무직을 맡기로 했을 때에도 내가 속한 예장통합측 목사님들과 이문제를 협의했다. 그리고 그과정에서 진보교회 목사님들과 복음주의 교회 중진목사님들이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보수와 진보가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만남의 시간이 마련되었던 셈이다.

나는 그동안 WCC(세계교회협의회)모임에 여러차례 초청을 받아서 간 적이 있는데, 한번은 그분들께 내가 한기총 협동총무로 일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말했던 적이 있다. 한기총은 NCC와 대립적인 조직이고, NCC는 WCC와 깊은 연관 관계에 있으므로 말하자면 WCC와 한기총은 정반대의 교회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분들은 내게 그곳에서 일하는 게 아주 좋은 일이라며 적극적인 찬성을 표했다. ‘만약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가 하나되는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내면 그것은 세계교회, 전세계 개신교교회가 하나되게 만드는 데 커다란 모델이 될 것이다’라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교회가 진보, 보수로 갈라져 있듯이 전 세계의 교회도 모두 두개로 갈라져 있다. WCC에 반대되는 복음주의 세계교회연맹이 있고, 보수교회연합, 로잔느교회라는 연대활동이 있다.

WCC는 그동안 전 세계 곳곳에서 억압과 착취와 독재에 맞서서 인간해방을 이루는 운동을 해왔던 셈인데,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가속화되면서 과거와 같이 혁명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이 불가능하며 이제는 시민들의 양심의 힘, 정의와 사랑의 힘을 키워서 그 힘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었다.

실제로 최근 WCC의 문건을 봐도 이러한 WCC의 사고의 전환을 일깨우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이처럼 세계교회가 보다 더 큰 힘, 보다 더 큰 자원을 가지고 인류의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수교회와 진보교회가 전세계적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겠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진보와 보수의 일치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다면 전세계 교회의 본보기가 되고 그것이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이제는 전세계가 분열에서 합일로, 파괴에서 창조로 나아가는 시대를 맞고 있고, 이는 교회운동의 경우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합일과 창조의 시대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