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1-07 16:03
   <나의 아버지>에서 <‘친ys, 반dj라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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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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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서재현장로는 재작년에 미수(米壽)를 지내셨으니 이제 90이 넘은 연세이시다. 금년 봄부터는 혈소판 생산이 줄어들어 3주에 한번씩 수혈을 받아야 하고, 바깥출입을 할 때에는 특별히 힘들어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나를 깨우는 일과 현관문 밖의 신문을 내 방 앞에 놓는 일을 계속 하신다.

정정하실 때에는 시장에 장보는 일, 부엌 설거지, 아침에 나를 깨우고 커피 타주시는 일들이 모두 아버지의 몫이었다. 항상 남에게 봉사하고 사는 것이 아버지의 삶의 철학인데, 요즈음 노쇠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위해 살고 계신다.

그런데도 하는 일없이 밥만 축낸다고 한동안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를 고민하셔서 자식들이 혼줄이 난 적도 있다.

우리 집안은 몇 가지 전통이 있다. 증조부이신 서경조목사는 한국 최초의 목사로 한국 최초로 황해도에 소래교회를 세우셨다.

조부이신 서병호장로는 독립운동에 나서셔서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정에 참여하셨고 신한청년당 당수를 지내셨다. 그렇지만 아버님은 평생을 기계엔지니어로 지내셔서 70세에 은퇴를 할 때까지 조선기계, 이천전기, 흥한화학, 강원산업 등으로 자리를 옮기시면서 기계공장을 떠난 적이 없다.

해방후 귀국하셔서 해군에 들어가 준장으로 복무하셨지만, 그것도 해군공청장으로 계셨다.

묘하게도 나는 이러한 3대의 전통을 다 계승한 셈이다.

아버님을 따라 기계공학을 공부했었고, 그후에는 목사이면서 사회운동가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버님은 조부와 증조부의 그늘에 가려 지내신 분이지만,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 우리 형제들은 실제로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만분지일만 닮아라 하는 소리를 귀가 아프게 들으며 자라 왔다.

그만큼 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이웃에 봉사하시고, 근검절약과 정직, 그리고 겸손을 실천하신 분이다. 아버지는 골프같은 특별한 운동을 하신 적이 없다. 매일 산보하시고 시장에 장보러 다니시는 것이 아버님의 건강유지법이었다.

해군준장 시절에도 양말이 해지면 전구를 집어넣어 기워 신으셨고, 공사가 분명하시고, 공무로 외국 출장을 가시면 항상 절약해서 남은 경비를 반납하셨다. 그리고 최근 몇 해를 제외하시고는 도대체 생일잔치도 받으시지 않으셨다.

또 아버님은 돈과 거리가 먼 분이다. 청탁을 일체 못하게 하고 선물은 수박 한 덩이도 거절하셔서 아랫사람이 가져왔다가도 집에 들이지 않아 집밖에서 썪곤했다.

국영기업체인 한국기계공업(주) 사장을 지내셨어도 돈이 없어 결혼 18년만에 은행융자를 받아 14평 짜리 문화주택을 겨우 장만하셨다.

또 아버지는 철저하게 겸손을 실천하신 분이다. 해군준장 시절에도 사병들에게 존칭을 사용하고, 문관들과 동거동락하셨으며,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하셨다.

금년 봄에 할아버지에 이어 2대째 국민훈장 애국장 포상을 받았지만, 자식들은 최근까지도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적을 몰랐었다.

최근 독립운동사료를 연구하시는 분이 아버지에게 강권하고, 나서지 않으시려는 아버지를 떠밀어 어렵게 공적신청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체 자신의 공로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탈선이나 위법은 상상할 수도 없는, 법이 필요없으신 분이시고, 기독교 신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신 분이다.

나는 아버지만큼 여러 면에서 내 생각과 신앙을 실천하고 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버지의 십분지 일만 닮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아마도 나는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만큼 내 자식에게 존경받지 못할 것같다.



세계를 울린 어머니의 기도


어머니께서는 팔순을 눈앞에 둔 분이지만, 그 시절에 대학교육까지 받으신 인텔리여성이시다.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지금의 남경대학)에서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하셨다.

이런 덕분에 어머니께서는 아버지께서 진해에 해군공창장으로 계실 때 이승만대통령을 비롯해 외국귀빈들이 그곳에 내려올 때마다 특유의 화술과 영어실력으로 분위기를 이끌곤 했었다. 이밖에도 장교부인회를 조직하거나 교회 여전도회 회장을 맡으시는 등 사회활동도 활발하게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막내동생을 낳기 전만 해도 똑똑한 아들을 둔 중상층 가정의 안주인으로 상당히 도도한 분이셨다고 하는데, 막내 현석이의 지능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특수학교에 보내면서 굉장히 겸손해 지셨다고 한다.

내가 기계과를 1년 휴학했을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아버지와 달리 나를 크게 탓하지 않았다. 뒤에 어머니께서는 ‘우선 너를 믿었고, 자기 앞길은 자기가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반대하지 않고 지켜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아들들의 생각을 존중해주시고, 신뢰를 보내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 덕분에 나는 사회 운동을 하면서도 부모님들의 이해를 받을 수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와 아내는 사회활동을 바쁘게 하고 있는데, 사실 어머니께서 가정생활을 돌보아 주시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다. 특히 어머니께서는 비록 자신은 봉건적인 우리사회의 현실 때문에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지 못했지만, 내 처만은 가정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원을 보내 주신다.

때문에 가끔씩 아내가 자신도 모르게 ‘엄마’라고 부를 정도로 딸처럼 허물없이 지내신다. 아내가 전주 한일신학교에 일주일에 3일동안 강의를 맡고 있으면서‘여성의 전화’ 대표를 맡아 여성운동을 펼 수 있는 것도 이런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이다.

어머니께서는 향학열이 워낙 높으셔서 81년부터 84년까지 장로회 신학대학 여성지도자과정을 이수하시기도 했다. 그때 어머니께서 노인복지 현황에 대한 레포트를 쓰셨는데, 담당교수로부터 ‘선생보다 더 낫다’는 극찬을 받으시기도 했다.

환갑 나이의 어머니께서 새벽 세시까지 붉을 밝히고 논문을 쓰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네째 동생 창석이와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각각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할 때이다. 당시 어머니는 가족면회조차 제대로 허용해주지 않던 그 무시무시한 시기에 두 아들을 감옥에 보내놓고 옥바라지를 하느라 애를 쓰셨다.

게다가 구속자가족들과 함께 우리들의 석방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셨는데, 특히 그 즈음 명당성당에서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연 연합기도회에서 구속자 가족 대표로 기도를 드렸다가 그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 뒤 세계 각국말로 번역되기도 했다.

나도 감옥에서 어머니의 기도문을 본 적이 있는데,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물론 한걸음 나아가 아들에게서 배운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절로 뭉클했다.

‘어머니의 기도’ 전문을 소개해본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또한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특권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옵나이다.

이자리에 많은 구속당한 사랑하는 아들들의 어머니들과 이 슬픔을 같이 나누는 많은 어머니들의 마음과 정성을 합하여 기도하오니 이 기도가 옛날의 솔로몬 왕과 같이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기도로 삼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바라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옥에 갇힌 지 어느덧 봄이 지나고 여름철이 지나 쌀쌀한 가을을 맞이하여 추석을 며칠 앞둔 저의 어머니들은 슬픈 마음과 눈물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때로는 높은 산을 헤매여 하나님 앞에 통곡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또 철야기도로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눈물의 호소를 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마옵시고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시고 저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의 아들들의 중심을 보살펴주시옵소서. 그들은 자기의 안일과 행복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들은 진정코 이웃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연희동 빈민의 아이들에게 야학으로 봉사하였습니다. 또한 소외된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고 위로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불쌍한 고아들의 벗이 되어 즐기기를 자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정직하며 불의를 싫어 하며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며 사랑을 실천하기를 노력하였습니다. 지금도 저의 아들들은 옥중에서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며 빵 한조각이라도 나누어 먹는 소식을 전해 들을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그들이 잘못이 있사옵거든 일곱번 일흔번이나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며 용서를 빌어 소원의 그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황인성의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는 시골에서 빨갱이 집이라는 오해를 받아 낙심하여 자살을 기도하였아오니 그를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김경남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품팔이를 하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사오니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시옵소서.

김영준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닷새 동안 금식을 하였답니다. 그의 유족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그외에도 많은 어머니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어머니들은 숱한 밤을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 아들을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룹니다. 길을 갈 때 그들의 친우를 만날 때는 목이 메어 말을 못합니다. 또한 매일 식탁을 대할 때 음식을 보고 어찌 아들 생각을 잊을 길이 있겠습니까?

주님이시여. 저의 가슴아픔을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희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이나라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과거에 내 자식만 잘 먹고 잘 입히겠다는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난을 깨닫지 못하고 내 자식이 세상에서 다 바라는 출세를 기대했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가난한 이웃을 보면서도 그들의 이웃되기를 꺼려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나라에 불우한 과부들과 고아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모든 사치를 좋아하는 어머니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저희들은 사랑하는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의 어머니들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희들에게 믿음을 허락하시사 이 어려운 시련을 능히 이기고도 내 이웃을 위하여 헌신봉사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깨달으며 저의 모든 성도들이 더욱 합심하여 하늘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두 아들이 구속된 학생의 어머니 --



사랑은 설겆이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나는 요즘 사람들의 부탁으로 최소한 한달에 한 번씩은 주례를 서곤 하는데, 주례라는 것이 두 부부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데 좋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므로 다른 어떤 설교보다 가장 좋은 말을 그들에게 들려 주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의 주례사는 늘 같은 내용이다.

내가 들려주는 주례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그리고 만약 기독교인이면 마태복음 7장을 인용해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에 모든 것을 더해주리라’라는 구절을 들려 준다.

이 구절에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에 가장 큰 목표로 두면 재물이나 행복이나 안정이나 그런 것은 다 뒤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만약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세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으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이야기 할 때에는 내 경험을 들려준다.

나는 지난 해 12월 결혼 20주년을 맞았는데, 돌이켜 보면 나도 결혼 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하겠다고 말했고 장미빛 사랑을 꿈꿨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시절은 6개월밖에 가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20주년을 맞을 즈음이 되니까 결혼과 사랑에 대해서 내가 젊은 시절 가졌던 생각이 얼마나 낭만적이며 비현실적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나는 KSCF 간사로 일하던 75년 12월 7일에 내처와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결혼을 한다니까 당시 나를 감시하던 중앙정보부 담당직원이 내게 “해군장성의 아들과 노동청노정국장 딸이 결혼을 하니까 격에 맞는다”는 얘기를 했다.

양쪽 집안으로 보자면 그 말이 맞고 부모들이 별로 반대할 게 없는 결혼같지만, 사실 나와 내 처가 결혼식을 올리기까지는 어려움이 많았다.

내가 민청학련으로 구속되어 20년형을 선고받고 10개월 정도 형을 살다가 나온 상황이었으니 처가집어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장인어른께서는 ‘전과자 사위를 맞을 수 없다’며 매우 반대하셨다.

우리가 이런 부모님들의 반대를 뚫고 결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사랑이 그만큼 뜨거웠고, 두 사람의 마음이 깊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결혼 전에 당시 애인인 아내에게 혹독한 옥바라지를 시켰기 때문에 결혼할 당시 평생 아내에게 이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까지의 결혼생활을 돌이켜 보면 나는 그다지 좋은 남편은 못되었던것 같다. 그래서인지 결혼과 사랑에 대한 반성도 깊다.

사랑이란 감미로운 분위기에서 아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아내를 위해 김치볶음밥을 해주고 설겆이를 함께 하고 아내와 다퉜을 때 내가 먼저 화해를 청하는 그런 것이다.

때문에 나는 주례사를 할 때 사랑은 아주 구체적으로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말하자면 집에 일찍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랑이다. 나처럼 일찍 들어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해도 기를 쓰고 일찍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또한 사랑은 설겆이를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부부싸움을 하고 먼저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부부싸움은 나쁜 것이 아니다. 결혼이란 어차피 서로 다른 가치관, 문화,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만나서 다른 점을 하나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므로 부부싸움을 통해서라도 이런 노력을 열심히 해야지 포기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부부싸움 뒤 냉전이 오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때문에 부부싸움을 24시간 이상 끌어서는 안된다. 이럴 때 자기가 먼저 자존심을 굽히고 화해의 약속을 청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남자가 자존심을 굽히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침실에서 남편의 자존심을 긁는다면 이것은 아주 문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4시간 안에 화해를 청해야 한다.

또한 사랑이란 한눈 팔지 않는 것이다. 처음 결혼할 때는 내 남편만을, 내 아내만을 사랑하겠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한 눈을 팔기가 쉽다. 남의 떡이 커보이고, 오로지 부인만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 손해보는 것같이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바로 사랑이다.

때문에 사랑은 어떤 야릇한 감정, 감상, 장미빛 기분이 아니라 성실하고 책임적인 사람만 할 수 있는 대단히 윤리적인 결단이고, 삶의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주례사를 통해 항상 들려 주는 말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내자신을 향해 다짐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빠,엄마는 너무 진지해요’


내게는 올해 대학 2학년이 되는 딸 하나와 고등학생이 된 아들 하나가 있다. 모든 부모들이 다 그렇듯이 나도 그 애들이 참 사랑스럽다. 하지만 그 나이 때의 내 모습과 비교해 보면 한편으로 불만스럽고 아쉬운 점도 적지 않다.

특히 지금 이화여대 사회학과 2학년이 되는 딸 지영이을 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나는 지난 해 초 딸이 대학시험을 치르고 난 뒤 혹시 딸이 시험에 실패하면 주려고 편지 한통을 썼다. 나는 그 편지에서 지영이에게 “실패를 오히려 보다 큰 발전을 위한 디딤돌로 삼기를 바라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학 낙방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썼다.

그런데 딸이 시험에 합격하는 바람에 내가 그 편지에서 하고자 했던 말이 별로 소용 없는 것이 되고 말았지만, 그 편지에 내가 쓰려고 했던 말은 진작부터 내가 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사실 지영이가 대학에 합격한 것이야 기쁜 일이었지만, 나는 내심 한편으로는 대학에 떨어져서 재수를 하는 것도 그애에게 좋은 경험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 이유는 지영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힘들고 어려운 경험을 별로 하지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지영이 나이일 때를 돌이켜 보면 나는 그 당시 기계과를 휴학하고 사회과학 공부를 시작했고 얼마 뒤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하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하리라는 결심을 했다. 대학 초년생이 감당하기엔 힘든 결정이었지만, 나는 고심 끝에 그런 결단을 내렸고 그 뒤 감옥에 3차례나 갔다 와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날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살았을 것이고, 그런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 보면 지금의 내 삶이 내게 훨씬 잘 맞고 보람스러운 일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나는 딸 아이도 단지 평범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쓴 편지에서도 나는 ‘지영이가 순탄하기만 한 삶을 살기를 원치 않고 창조적인 삶, 도전하는 삶, 강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고 썼다.

그리고 ‘이제 대학에 낙방해 그런 어려움을 알게 되었으니 고통을 겪는 사람들, 실패하고 낙오한 사람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겸손함과 이해심, 그리고 여유를 갖게 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이번의 너의 실패는 값진 것이다’라고 썼다.

물론 내가 딸 지영이를 보면서 이런 생각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지영이를 보면 늘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는데, 내가 YH사건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한번은 내 처가 세살된 지영이를 데리고 면회를 왔는데, 어린 마음에도 아빠를 기쁘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면회실 창틀에 서서 재롱을 피우며 예쁘게 춤을 추었다. 그래서 내가 ‘이제 너 오줌 안싸니’했더니 울먹울먹하다가 막 울어 버렸다.

자기 딴에는 아빠를 위해서 예쁜 춤을 추었는데, 내가 자기의 부끄러운 구석을 들추어서 부끄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런 지영이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지영이가 나중에 커서 나같이 감옥에나 드나드는 운동권 청년과 결혼 하겠다고 하면 나는 과연 허락해 줄 수 있을까’

그런데 솔직히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래도 결혼허락을 해줄 수 없을 것같았다.

내 처는 나와 결혼하기 위해서 아버지와 오랫동안 투쟁을 벌여야 했다. 그때 장인어른의 생각은 ‘전과자에게는 절대로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런 장인어른을 설득하고 설득해서 결국 결혼을 했지만, 정작 딸이 그런 청년을 내 앞에 데려와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하면 나부터도 그 결혼을 말리게 될 것같더라는 얘기다.

그러나 요즘 아내와 나는 지영이에게 ‘대학생이 그렇게 사회에 대한 고민없이 살아가느냐’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러면 지영이는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내게만 그러느냐, 고등학교 때 공부하느라 놀지 못했으니 대학에 들어온 지금은 좀 놀아도 좋지 않느냐”고 한다. 심지어 “다른 집은 자식들이 사회문제에 너무 관심을 가져 데모를 할까봐 걱정을 하는데, 우리 집은 부모님이 너무 진지해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며 불만을 터뜨리기도 한다.

한편으로 나는 이처럼 지영이가 우리들이 대학에 다녔던 옛날처럼 고난 속에서 사랑을 피워야 하는 그런 아픔을 겪지 않고 살고 있다는 점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뜨거움과 귀함, 숭고함, 아름다움 등의 절실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사는 것같아 무척 아쉽다.

그리고 비단 지영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에 대해서도 그런 아쉬움을 갖고 있다. 내가 보기에 많은 젊은이들이 인류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책임감을 갖고 자기 몸을 던지기도 하는, 그런 치열한 삶을 살기 보다 안락하고 자기 위주의 삶을 사는 것같아서이다.

80년대 초 미국에 갔을 때 재미교포 고등학생들의 흐리멍텅하게 풀린 눈을 보면서 ‘이들의 앞날이 참 걱정스럽구나’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내가 미국 시절 교포학생들의 눈을 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때문에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이야기를 자주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조들이 지난 날 나라를 잏고 독립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고, 해방 이후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성장을 이루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으며, 군사독재 치하에서 민주주의의 쟁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고난을 겪었는지를 듣고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비록 요즘 젊은이들 앞에 이런 시련이 없더라도 이런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 하면 내가 좀더 진지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하는 자극을 받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진지하게 고민해야할 과제들은 참 많다. 환경문제, 에너지고갈, 오염, 기후변화문제 등이 그것이다.

만약 지금의 경제성장과 소비수준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50년 뒤에는 지구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이 현재와 같은 상태를 유지할 수 없으므로 어찌 보면 과거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오늘의 젊은이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운동에 나서야 한다.

사실 나는 인생을 편하게 살수 있는 조건에 있었던 사람이다. 우선 가난을 경험한 적이 없었고, 중상층 집안에서 태어나서 순탄하게 명문 중고등하교를 졸업하고 일류대학 공과대학에 들어갔으니 마음만 먹었다면 훌륭한 사윗감에 생활이 안정된 엔지니어로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록 내가 대학 시절 우리 사회의 모순을 깨닫고 민주화운동에 뛰어들면서 고통도 많이 겪었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의 도전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 맞서서 내 몸을 던지는 참다운 기쁨을 체험하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사랑이 있고, 인생의 진지함이 있는 삶이 참되고 멋진 삶이라는 생각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젊은이들을 만날 때면 ‘인생의 참다운 맛은 시련과 도전을 극복하고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꼭 들려 주고 싶다.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대학시절 순진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다 보면 잊혀지지 않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가 민주화운동을 할 것이냐 말것이냐를 고심할 즈음에 나는 어찌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다녔는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으면 좀 불편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런 형편이다 보니 여학생과 데이트를 해도 관계가 제대로 발전되지 않았다.어쩌다가 몇번 만나는 여학생이 생겨도 그 당시 내 관심사가 온통 민족이니 사회정의니 하는 관념적인 것이었던 탓에 여자들이 ‘무슨 남자가 이렇게 재미가 없느냐’며 도망치기에 바빴다.

내 생각에도 평범한 여자들의 눈에는 내가 무척 이상하게 보였을 것같다.

내가 대학 3학년말에 KSCF 겨울대회에 처음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보기에 아주 예뻐보이는 여학생이 한명 있었다.

지금 내가 기억하기로는 전라북도의 어느 간호전문대학에 다니는 지방 KSCF 소속 여학생이었던 것같다. 나는 그 여학생에게 호감을 갖고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 눈길을 보내면서 관심을 보였는데, 그 여학생도 내가 싫지 않았던지 내가 말을 붙이면 살포시 웃어주곤 했다.

프로그램이 끝나가는 마지막 날 두시간 동안 휴식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그 여학생에게 “산에 가서 같이 산책하지 않을래요?”라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 여학생도 별로 거부감 없이 순순히 따라와주어서 그 여학생과 나는 마침내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20대 초반의 젊은 남녀가 둘이서만 따로 산에 올라 갔으니 아주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 당시 내게 그런 연애 테크닉이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산에 올라가서 줄곧 그 여학생에게 민족주의가 어떻고 민주화투쟁이 어떠니 하는 골치 아픈 이야기만 계속 늘어 놓았고, 그 여학생도 처음에는 고개도 끄덕이고 말대꾸도 하더니 한시간 쯤 지나자 아예 말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휴식시간이 다 끝나서 두 사람은 그냥 산에서 내려 오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까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는 호감이 가는 여학생과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려고 산에 올라 갔는데, 재미있는 시간은 커녕 오히려 올라갈 때보다 더 어색한 사이가 되고 만 것같았다. 특히 그 여학생은 따분하고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자 무언가 손안에 든 새가 빠져 나가는 느낌이 들어 내가 내려오던 길을 막아서서 대뜸 그 여학생에게 “키스해도 좋을까요?”하고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여학생은 너무 당황했던지 나를 피해서 막 내려 갔고, 나는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하면서 그 여학생을 막 뒤따라갔다.

그리고 나서 그 여학생은 내게 기겁을 했던지 그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나를 아예 쳐다 보지도 않았다. 나도 그때 당시 참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남아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생각해볼수록 참 한심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산에서 내려 와서 오재식선생, 김용복선생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었더니 이분들이 배꼽을 잡고 웃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그래서 한동안 사람들이 나를 ‘키스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부르기도 했다.

참 배꼽잡을 에피소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순진했던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운동권친구의 평생 보증인이 돼준 현직 부장판사


평생 한 명의 좋은 친구를 얻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는 주변에 참 좋은 친구들을 많이 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김용담은 나와 걷는 길이 달랐음에도 가장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 주었다는 점에서 우정의 가치를 새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친구다.

김용담은 서울고 18회 동기이며 나와 새문안교회를 함께 다녔다. 내가 서울대 기계과에 입학했을 때 용담이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새문안교회에서 대학생회를 만들었을 때에도 내가 총무를 맡고 용담이가 서기를 맡는 식이었다.

어찌 보면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용담이는 지적이고 냉정한 면이 있는 반면에 나는 정열적이고 뜨거운 열정을 가졌다.

그 당시 새문안교회 친구들 가운데 우수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용담이와 내가 부각되었던 편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두사람을 자주 비교하곤 했고, 알게 모르게 서로가 라이벌의식도 갖고 있었다.

사실 나는 대학시절에는 용담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 시절 내 눈에는 용담이가 무척 건방지게 보였고, 막걸리는 안마시고 맥주만 좋아하는 태도도 내겐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는 별로 취향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는데, 용담이는 그 시절 데모는 안하고 고시공부만 열심히 하더니 대학 3학년때엔 고시에 합격했다. 그러면서 날더러 “너는 할 일없이 골목대장만 하고 있다. 그래 가지고 뭐가 되겠니”라며 한심스러워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도 무시해버렸지만, 막상 용담이가 고시에 패스하자 한편으로 마음이 착잡하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대학을 1년 휴학하고 복학한 상태에서 통혁당에 연루되어서 조사를 받고 막 나왔을 때였다.

그뒤 용담이가 고시합격생으로 연수원에 다니고 판사가 될 즈음에 나는 민청학련사건으로 감옥을 가서 징역 20년을 받았다.

어찌 보면 용담이와 나의 인연은 그 정도에서 끝이 나도 별로 이상할 게 없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석방이 되어 나오고 얼마 뒤 제주도에 초임판사로 내려 가있던 용담이가 내게 여러차례 연락하여 꼭 한번 제주도로 내려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 해 처와 함께 제주도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그때 나는 이 친구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나에 대한 정이 아주 지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 70년대에 내가 유치장에 들락거릴 때마다 보증설 일이 있으면 모두 용담이가 설 정도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당시 용담이의 신분이 판사(3급이상 공무원)였으니 자칫 운동권 친구의 보증을 서다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용담이는 그것에 아랑곳 않았다.

지방에 부임해 있을 때에도 내가 감옥에 갔다 하면 굳이 올라와 면회를 오곤 했는데, 이 친구가 면회를 올 때면 특별면회여서 담배도 피울 수 있었다.

내가 80년 동일방직 사건으로 세번 째 감옥을 살고 나왔을 무렵 이 친구가 하루는 내게 만나자고 하더니 프라자호텔에서 멋진 양식을 대접해주었다.

그러더니 ‘이제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나를 설득했다. 나는 용담이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미국유학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말하자면 용담이의 ‘미국유학을 가는 게 좋겠다’는 얘기가 내가 미국유학을 생각하게 된 첫 계기였던 셈이다. 실제로 나는 그 얘기를 듣고난 뒤부터 유학준비를 해서 1년반 정도 지난 뒤에 미국에 갔다.

미국에 갈 때에도 내가 외국에 나갈 수 있는 모든 보증을 용담이가 다 서주었다. 마지막에 공항 블랙리스트에 걸려 짐만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 때에도 이것을 풀어준 사람이 용담이다.

돌아와서 내가 새문안교회 친구들을 중심으로 새마당이라는 모임을 만들었을 때 용담이도 주요한 멤버가 되었는데, 그 시절 내가 기사연에서 쫒겨나자 매우 안타까와하면서 나를 도와주려고 힘써주었다.

그 당시 내가 목회를 했으면 하고 바랬던 서울대앞 다락방교회에도 용담이와 함께 갔었는데, 결국 내가 그 교회에도 못가게 되어 낙심하게 되자 용담이가 내게 “자기가 매달 고등학교 동창들에게서 한달에 1백50만원 가량을 모아줄 터이니 새로운 운동을 구상해봐라”는 제안을 했다.

사실 용담이의 이 제안이 내가 경실련운동을 시작하게된 계기가 되었다.

용담이는 지금 서울고법의 부장판사이다. 물론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나와 다소 다르고, 발을 딛고 있는 자리도 참 다르다. 하지만 자신은 판사로서의 외길을 가면서 한편으로 내가 하고 있는 민주화운동이 잘되기를 바라고 열심히 뒤에서 성원해준 친구다.

돌이켜 보면 용담이와 같은 친구가 진정한 우정으로 나를 성원하고 돕지 않았다면 나는 좌절을 해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어찌 보면 지금의 내 모습과 경실련의 성공은 이런 좋은 친구의 우정 덕분이라고도 볼 수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친구라는 것이 참 좋은 관계라고 느껴 진다.

나는 징역을 세 번 다녀왔고 용담이는 현직 부장판사이지만, 아무런 허물이 없고 어려운 점이 있을 때 진심으로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영빵 반쪽에 얽힌 사연


‘하나를 보면 열을 할 수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있다.

자신의 허물을 아무리 숨기려 해도 평상시 몸에 밴 허물을 덮을 수 없고, 그 사람의 한 가지 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나도 군대에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사실 군대에서 받는 훈련은 자기 체력과의 싸움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고되다.

특히 해군장교들은 훈련병 시절에 기수구보라는 훈련을 받는데, 힘든 훈련과정에서도 가장 힘든 것이다. 기수후보란 우리가 훈련받던 곳인 해군사관학교 교정을 자기 기수만큼 도는 것인데, 그때 내가 53차였으니 쉰 세바퀴를 돌아야 하는 셈이었다.

쉰 세바퀴를 뛰자면 거의 40Km를 뛰어야 하고 그러자면 두세시간은 족히 뛰어야 했다. 완전무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앞에 총’을 한 자세로 뛰어야 하는 탓에 운동복 차림으로 뛰는 것보다 훨씬 힘들었다.

이 훈련을 한번 받고 나면 그야말로 몸에 알통만 남고 군살이 다 빠져 버린다. 말하자면 그런 훈련을 통해 완전히 군인의 몸으로 만들어 주는 셈이다.

실제로 그렇게 훈련받으면서 일곱 주일이 지나고 나니까 비교적 통통하던 몸이 완전히 알통만 남았던 기억이 있다.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얘기는 그 당시 훈련에 들어가기 직전에 부대에서 나눠준 빵 반쪽에 얽힌 이야기다.

대영빵이라고 부르던 것인데, 훈련을 하다 보면 허기가 지니까 구보 전에 배급된 빵을 먼저 먹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고 나면 다시 허기를 참기 어려워 했다. 그런데 한번은 함께 훈련을 받던 동료 한 사람이 내게 “지금은 너 빵을 나하고 같이 먹고 훈련이 끝나고 나면 내 빵을 또 같이 먹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이러나 저러나 마찬가지여서 그러자고 하고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내빵을 잘라 그 친구와 함께 나눠 먹었다.

그런데 정작 훈련이 끝나고 나자 이 친구가 내게 빵을 나눠 먹자는 말을 하지않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벌써 혼자 그빵을 다 먹어버린 것같았다.

결국 나는 꼬르륵대는 배를 감싸고 허기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대영빵 반쪽에 불과했지만, 참 얌체같고 야속하기가 그지 없었다.

지금도 동기생들을 만날 때면 그 친구를 가끔 보는데, 지금도 그친구를 보면 ‘군대 시절 내 대영빵 반쪽을 잘라 먹은 놈’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반면 대영빵에 얽힌 또 하나의 사연이 있는데, 그것은 반대의 경험이다.

한번은 내가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대영빵을 다 먹어버린 탓에 훈련이 끝난 뒤 배가 너무 고파서 힘없이 앉아 있는데, 한 친구가 자기 빵을 꺼내어서 막 먹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그 친구를 물끄러미 쳐다 보고서는 머리를 쑥 내밀고 빵을 쳐다 보았다.

그러자 그 친구가 그 자리에서 자기 빵을 둘로 쪼개더니 반쪽을 내게 주고 자기가 나머지 반쪽을 먹는 것이 아닌가.

나는 너무 배가 고팠던 터라 그것을 받아서 그 자리에서 정신 없이 먹어 버렸다. 빵 반쪽을 그렇게 맛있게 먹었던 적도 드물었던 것같다.

그 친구도 동기생 모임에서 가끔 만나는데, 그럴 때마다 맨 먼저 ‘아 저 친구는 그 옛날 대영빵 반쪽을 준 친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빵 반쪽을 주거나 받는 게 뭐 그리 대단하냐 하겠지만, 그처럼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남을 돌보고 내 것을 남에게 나누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이런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점 때문에 자기가 어려운 때 남을 돕는 것이 더욱 귀한 일인가도 알게 된다.

그리고 또 하나, 대영빵에 얽힌 두 친구의 행동은 사실 그 친구들의 대부분의 생활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나를 속이고 내 대영빵 반쪽을 먹었던 친구는 지금도 주변에서 구두쇠라는 평가를 듣고 좋은 친구들이 별로 없이 지내는 편이다.

반면 내게 자기 대영빵 반쪽을 준 친구는 지금도 사람들에게서 마음씨가 착한 사람이라는 아주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대영빵 반쪽을 두고도 이렇게 한 개인의 인간성의 깊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를 감동시킨 기업인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한국특수선의 박종규사장이시다.

한번은 경실련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경희대 양설철교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용인즉 어느 좌석에서 박사장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말하기를 ‘자기는 아무래도 경실련 운동에 마음이 끌린다. 그래서 경실련이 잘되어야 우리사회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말을 듣고 양교수가 내가 서목사를 잘 알고 있으니 소개해주겠다고 했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처음 박종규사장을 만나게 되었는데, 만난 뒤 보니까 그분은 나의 고등학교 선배이시면서 고교시절 친한 친구인 박종안의 친형님이었다.

그분은 내게서 경실련의 취지와 운동내용을 전부 듣고서는 자신도 경실련 운동에 참여하겠다고 하시며 상당히 큰 돈을 재정후원금으로 내놓으셨다.

최근에 배당을 받은 돈이 좀 있다는 말씀이셨다. 그날 이후로 그분은 경실련 활동을 열심히 하신 것은 물론이고 매달 정기적으로 재정지원도 하고 계신다.

그런데 내가 그분께 감동을 받은 것은 이처럼 경실련과 같은 생각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 아니다. 그분의 삶이 너무도 진지하고 모범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서울의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여 전국선원노조의 부위원장을 지낸 적도 있는 분이다.

그러다가 70년대에 해운업을 시작하셨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하여 본인 자신의 주식소유 비율을 20%까지 낮추었다. 그렇게 되니 사실상 전 종업원의 회사가 된 셈이다.

이 회사에 노사간의 극한적인 대립이나 투쟁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뿐만 아니다. 그분은 회사의 경리장부를 공개하여 사장이 회사돈을 빼돌리는 일도 없고 이중장부를 만들거나 이중가격을 매기는 일도 없다.

더구나 회사가 부동산투기를 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사장부터 청렴하니까 그 회사에는 부정부패가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상하간에 신뢰가 두터우니까 거래사의 물품가격결정도 과장급에서 전결로 이루어진다.

권한이 자꾸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니 이 회사 직원들이 이분께 갖고 있는 신뢰도 당연히 이만저만이 아니다.

게다가 그분은 30평도 못되는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아들 셋을 두었지만, 일찌기 아들들에게 회사를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아들들은 아예 회사를 이어받을 생각을 하지 않은 지 오래다.

만약 그분이 자신의 경영철학을 고집하지 않고 권력과 결탁하여 회사를 키웠다면 지금쯤은 훨씬 큰 회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분은 그러지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살았고 그렇게 사느라 이 부정부패가 가득찬 세상에서 여간 고충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은 경실련에 참여한 뒤에도 많은 기여를 하셨다.

우선 경실련의 경제학자들이 기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길안내자의 역할을 하셨다.

사실 경실련 초기엔 학자들의 현실감각이 다소 부족한 면이 있었고, 대기업에 대한 불신이 깊었다. 하지만 그런 학자들이 박사장이 하는 말은 어떤 것이건 그대로 믿었다. 박사장의 이야기를 듣고 학자들이 현실감각을 익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업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지만, 경실련학자들에게도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박사장 스스로가 워낙에 개혁적인 분이어서 이분의 의견과 아이디어가 경실련에 큰 도움이 된 적도 많다.

그리고 이분은 지금 현재 경실련의 중앙위원회 의장을 맡고 있는데, 경제정의를 운동의 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경실련의 성격상 기업체의 사장이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실련 사람들이 그분께 갖고 있는 신뢰가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박사장이 경실련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해서 경실련에 매달 1백만원씩 돕는 기업인들이 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이런 기업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바른경제동우인라는 조직이 만들어 졌다.

기업인들 스스로가 바른 기업이념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만든 모임이었는데, 4~50대 기업인들이 주로 모였다. 지금 이 바른경제동인는 경실련과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지만, 경실련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박사장은 이 모임의 대표도 맡으셔서 자기 평생을 걸고 이일을 하고 계시다.

나는 그분과 같은 훌륭한 기업인과 교분을 맺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가난한 사람이 경제정의를 외치는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기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자가 자기 소유를 남과 나누며 경제정의실현을 위한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정의의 반대는 의리


내가 잘하는 말 가운데 ‘정의의 반대는 의리’라는 말이 있다.

사실 과거에는 ‘정의의 반대는 불의’였고, 감옥갈 용기만 있다면 정의를 지키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에 와서는 그런 시대는 지나 갔고 정의의 반대는 오히려 의리라고 생각한다. 정의를 위해서 의리를 저버릴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만 거꾸로 정의를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경실련 활동을 하면서 이 사실을 정말 절감했다.

포항제철의 선거개입 사건 때 우리가 허화평후보 측의 음모에 그처럼 쉽게 속아 넘어 갔던 이유도 어떻게 보면 ‘정의의 반대는 의리’라는 생각으로 포철과의 의리에 얽매어 공명선거라는 정의를 저버리지 않아야 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그때 포철의 선거개입사건을 공개하면서 포철사람들이 내게 몰려와 ‘서총장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도와드렸는데’라고 항의할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로도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기업에 해가 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세 사람에게 양심선언할 기회를 주자는 결정을 내렸던 그 주간 내내 너무 골치가 아파서 끙끙 앓기도 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 ‘포철의 선거개입에 대한 양심선언 자리’가 허화평 후보측의 음모로 이뤄졌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또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했겠는가.

내가 경실련의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겪었던 이런 경험은 상당히 많다.

예를 들면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 경실련은 두산그룹과 충돌이 생기지 않을 수없었는데, 당시 두산그룹은 경실련에서 발간하던 잡지인 ‘경제정의’에 꼬박꼬박 광고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두산의 페놀사건이 터진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두산과 싸움을 벌여야 했고, 오히려 우리 스스로가 두산의 광고를 거절했다. 두산 쪽에서는 광고를 계속 주겠다고 했지만, 우리측에서 ‘이 사건이 끝난 뒤 다시 광고를 주면 받겠습니다’고 정중하게 거절했고, 실제로 페놀사태가 마무리되고 한참 지난 뒤에야 다시 광고를 받기 시작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집문제에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에도 이회장의 집과 얽힌 비리가 경실련이 발간하던 주간 ‘시민의 신문’에 제보로 들어왔는데, 삼성은 그 당시 우리에게 꾸준히 광고도 주고 있었을 뿐 아니라 프로젝트도 함께 하고 있던 재벌이었다.하지만 시민의 신문으로서는 그 제보의 내용이 거짓이 아닌 이상 그것을 보도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데 제보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삼성에서는 우리에게 ‘보도를 하지 말아달라’고 집요하게 호소를 했다. 주로 그 동안 경실련을 가까이에서 도왔던 분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참으로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그분의 회사에서의 체면, 위치를 생각하면 당연히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제보자는 경실련도 결국은 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사무총장인 나로서는 도저히 실무자에게 “봐주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물론 내가 ‘그 보도는 빼거나 줄이자’라고 하면 실무자들이 내 뜻에 따르겠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실무자는 나는 물론이고 경실련에 대해서도 실망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게다가 나는 실무자교육 때마다 “경실련은 어떤 경우에도 로비가 통하지 않는 마지막 단체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나는 경실련 사무총장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외부의 압력이나 재정적인 관계 때문에 실무자에게 어떤 간섭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나는 우리가 그 내용을 보도한 다음 거꾸로 그 회사에 찾아가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참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저희의 사정을 이해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겪다 보면 어떤 기업이 우리를 재정적으로 도와 줬기 때문이 아니라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인간관계 때문에 더욱 힘이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대기업에서는 ‘보험금을 낸다’는 생각으로 홍보비를 쓰고 있기 때문에 설사 경실련이 자기 회사에 불리한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고 당장에 홍보비를 대폭 줄이거나 하지는 않는다. 또한 로비를 한다고 그들이 돈보따리를 짊어지고 오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재정적인 부담 때문에 로비를 뿌리치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 즉 ‘의리’를 내세운 그들의 로비를 뿌리치기가 참 괴롭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화그룹 김승연회장의 LA땅투기사건의 예가 그랬다. 한화그룹은 그전까지 경실련에 재정지원을 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경실련의 부정부패추방 운동본부가 이 재산도피건을 검찰에 고발하려 하자 한화그룹에서는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이를 막아달아고 부탁을 해왔다.

실제로 그 당시 경실련 어른을 비롯해 10여명의 동창 등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총동원되어 내게 ‘고발하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했다.

하지만 이 때도 경실련은 결국 김회장의 해외부동산투기를 검찰에 고발했고 이를 계기로 한화그룹의 로비 때문에 침묵하고 있던 각 언론에서 이기사를 크게 다루기 시작해 결국 김승연회장의 구속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 나와 신대균사무처장은 이를 고발할 것인가 말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런 내 모습을 실무자들이 숨죽이면서 지켜 봤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때 김회장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실무자들이 굉장히 실망했을 것이다. 실무자들 가운데에는 ‘내가 박봉에 시달리면서 밤 12시까지 왜 일해야 하는가’하는 회의를 품는 사람이 나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비를 뿌리치고 김회장을 고발한 경실련 지도부의 행동을 보고 실무자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고 실제로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자긍심이 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것이 경실련의 힘이다. ‘로비가 통하지 않는 마지막 단체, 짠 맛을 잃지 않는 실무자’들, 이런 힘이 경실련을 지금처럼 신뢰받는 단체로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뒤안길에는 매우 고통스러운 체험과 아픔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구속된 김승여노히장에 대한 미안함도 있다.

그래서 꼭 한번 면회를 가려고 했으나 어쩌다 그러지 못한 채로 그분이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아주 훌륭하게 수감생활을 보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친 YS, 반 DJ라고?’


흔히 사람들은 경실련이 정부 요직으로 나가는 건널목이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아마도 경실련 출신인사 가운데 정부 각 부서로 자리를 옮겨간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경실련에 훌륭한 학자들과 교수들이 많다 보니 경실련 사람들 가운데 정부에 들어간 사람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박세일 청와대 사회복지수석, 이각범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경실련 출신이고, 정성철 민자당 강남갑위원장, 민자당의 연구기관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지낸 이영희교수도 경실련 출신이다.

나는 이들이 정부에 들어갈 때마다 적극적으로 환영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정성철 변호사가 민자당에 입당할 때에는 나는 가능하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반대의견을 밝혔다. 정변호사는 처음에 대통령 정무제1보좌관으로 갔는데, 나는 이왕에 정치를 하려면 오히려 야당 쪽으로 갔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었다.

이영희교수가 여의도연구소에 갈 때는 내가 러시아에 가 있었던 관계로 사전에 나와 상의를 하지는 못했다.

박세일 수석이 청와대에 들어갈 때에는 나와 사전에 상의를 했는데, 나는 “혼자서 들어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또 박교수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경실련이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물론 구설수나 공정성, 중립성에 대한 훼손과 같은 그런 타격은 우리가 감수할 수 있지만, 박교수가 혼자 들어가서는 별 일을 못할 것같으니 이왕 들어가려면 팀을 구성해서 들어가는 게 좋겠고,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박교수도 내말을 듣고 그 점을 많이 고려한 것같은데, 결과적으로 혼자 들어간 셈이 되어서 청와대에 들어간 뒤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박교수는 경실련 정책위원장으로 있다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들어갔는데, 남들이 보기엔 청와대에 들어갔으니 좋은 점이 많으리라고 생각할 지 몰라도 사실 박교수로서는 사실 굉장한 희생을 감수한 결정이었다.

당시 박교수는 서울대 교수였는데, 청와대 정책수석과 비교하면 교수직이 65세 정년이 보장된 훨씬 안정되고 편한 직업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당시엔 대통령의 인기가 워낙에 떨어져 있었던 때여서 이미 청와대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조차 어떻게 하면 그곳을 떠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박교수가 청와대에 들어간 것이 그야말로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박교수가 들어간 뒤 그의 노력이 어떻게든 성공을 거둘 수 있도록 힘이 닿는 대로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내가 정부산하 위원회인 세계화추진위 위원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런 것 때문이다.

내가 세계화추진위원회에 위원으로 요청을 받고 들어갈 때 이 문제로 경실련 상임집행위에서 토론이 열렸었다. 이때 내가 세추위 위원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잘못하면 경실련이 정부에 협력하는 것처럼 오해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우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깨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가치기준을 ys와 dj의 대결구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친YS 혹은 친DJ로 보는데, 나는 이런 점이 아주 못마땅했다.

사실 경실련은 친ys도 반ys도 아니며, 반면 친dj도 반dj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이 어떤 입장이건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그런 단체일 뿐이다

또한 나는 정부위원회 같은 곳에 참여할 수 있다면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노정권부터 그런 생각을 가졌었고, ys정권 때는 더욱 그러했다. 다만 위원회에 참여한다고 해서 소신있는 발언을 삼간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문제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시민운동이라는 것이 열심히 시민참여를 강조하는 운동이며, 경실련은 김영삼 정부가 처음 출범할 때 시민참여를 극대화하는 구조를 갖추라고 요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정부가 위원회를 만들어서 시민단체대표를 위원으로 초청을 했는데, 우리가 무조건 안들어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시민참여가 확대된 사회를 거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실제로는 정부 위원회에 참여하는 작업을 경실련만 한 것은 아니다. 여성단체연합,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환경운동연합 등 여러 재야단체들도 이부분에 참여했다.

오히려 나는 내가 개혁신당 작업에 참여하면서 세추위 위원으로서 많은 일을 하지는 못한 것을 더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 당시 나는 해외동포활성화방안, 외국인노동자, 민간운동활성화방안 등 몇가지 대책을 주관하는 위원을 맡고 있었고, 사법개혁, 언론개혁에도 관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을 하려고 했는데, 개혁신당 작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사표를 내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추위에 몸담으면서 느낀 점이 참 많았다. 우선 개혁이란 무엇이며, 우리사회에서 개혁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우리사회의 개혁은 개혁의지를 가진 청와대와 기득권을 대변하고 있는 각 부처간의 대결에서 청와대가 승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청와대가 개혁적이지 않으면 개혁은 불가능하다. 내 경험으로는 각 부처가 개혁적이도록 기대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각부처에는 그 배후에 엄청난 기득권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사법개혁만 봐도 법무부의 배후에는 변호사집단,판사집단,검사집단 들이 존재한다. 보건복지부의 배후에는 약사,의사,등 많은 이해관계 집단들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각 부처는 이런 배후의 기득권 세력들과 모두 공생관계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개혁을 이루려면 제일 먼저 대통령의 개혁의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의 개혁의지에 각 부처들이 완전히 제압당해야 한다.

그런데 김영삼 대통령은 두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한쪽으로는 개혁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보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박세일 수석같은 사람은 김대통령의 개혁적인 부분을 계속 강화시켜나가도록 그편에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번 개각 때 이각범교수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들어갔는데, 이 바람에 경실련은 더욱 ‘친ys’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다. 이각범 수석은 미국에 가 있다가 박세일 수석의 권유로 이번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이 두사람은 나와 절친한 친구들이어서 사실 나도 이 와중에 많은 구설수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경실련을 ‘친YS냐’ 혹은 ‘친DJ냐’ 하는 식으로 평가하려는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느끼고 있다.

이런 식의 평가는 경실련으로 하여금 일부러 정부를 비판하게 만들거나 혹은 필요 이상으로 정부를 지지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경실련은 이러한 외부의 평가를 의식하여서 안되고, 의연하고 소신있게 자기 길을 가야 한다. 외부의 눈을 의식해서 행동을 조심하거나 또는 무리한 행동을 하는 순간 경실련은 정도(正道)를 벗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