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1-07 15:59
   공선협활동에서 터득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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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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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협활동에서 터득한 교훈


1991년에는 오랜 정치공방 끝에 30년만에 부활되는 지방자치제 선거로 인해 ‘어떻게 하면 공명선거를 치를 것인가’가 우리사회의 가장 큰 이슈로 등장했다.

나는 이번 선거야 말로 시민단체들이 적극 나서서 공명선거 분위기를 우리사회에 뿌리내리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뒤 이어 한해 걸러 한번씩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치러야 하는 까닭에 지자제선거에서 공명선거 분위기를 정착시켜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공명선거캠페인을 할 의사를 가지고 있는 시민단체들을 모아 91년 1월 7일 드디어 ‘공명선거실천 시민운동협의회’를 창립했다.

이때 참가단체는 경실련, 서울YMCA, 한국노총, 공명선거실천기독교 대책위원회(공선기위), 공명선거추진불교도 시민운동연합(공불련), 흥사단, 한국여성유권자연맹, 자유지성300인회, 숙년회 등 9개 단체였다.

당시 재야운동 진영에서도 공명선거를 펴고 있었지만, 후보지지운동적인 성격이 짙었다. 우리나라 선거법 상으로는 다른 단체나 사람들이 어느 한편의 후보에 대해 지지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재야운동이 공명선거분위기 확산에서 한걸음 나아가 개혁적인 사람들이 더 많이 뽑히도록 하자는 좀더 적극적인 운동방법을 택하고 있었지만, 현행법상으로 법위반으로 걸려들 소지가 많았다. 반면 공선협은 공명선거를 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열심히 하는 것을 그 목표로 삼고 있었다.

나는 공선협의 권위를 세우는 일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여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이 얼마나 중립적이고 공정한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우리는 공선협 활동의 3대원칙을 중립성, 공정성, 도덕성으로 정하고 이것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여당이냐 야당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끗하고 정직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공선협의 활동이 대체로 야당을 지원하는 경향을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공선협이 진실로 공정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예컨대 선거자금의 측면에서만 봐도 야당이 만원을 썼다면 여당은 10만원을 쓰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선협 활동을 하다보니 지역에 내려갈수록 공선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마치 여당을 떨어 뜨리기 위한 운동으로 잘못 이해되어 다분히 편파적인 활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말이 공선협이지 사실은 특정후보 지지를 위해서는 공선협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여 이 운동이 생긴곳도 있었다.

특히 국민회의나 전교조 지부와 같은 재야단체들의 경우 공개적으로 야당을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공개적으로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단체들은 공선협의 회원단체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분명히 했다. 그러다 보니 한편에서는 공선협의 한계를 지적하는 사람들도 생겼는데, 이럴 때 우리는 이렇게 답변했다.

“우리는 바로 그런 한계를 엄격히 지키고 그 한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운동입니다”라고.

공선협은 우리 국민의 70%의 사람들만이 동의하는 일을 하는 운동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99%가 동의하는 일을 하는 운동이다.

때문에 그동안 공선협은 정치적 쟁점이 될 소지가 있는 문제는 일부러 다루지 않았다. 이 운동은 여당에 투표할 사람이든 야당에 투표할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운동이 국민의 신뢰를 얻어 성공할 때에만 비로소 공명선거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방침 아래 공선협이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사업은 스티커 부착운동이었다. 하지만 비용이 많이 드는 게 문제였는데, 고심 끝에 결국엔 스티커를 한장에 1백원씩 돈을 받고 팔았다.

이렇게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스티커 제작비를 자체적으로 마련할 목적이 있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공명선거캠페인 스티커를 1백원을 주고 산다는 행위 자체가 공명선거캠페인의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몇차례 선거를 치르면서 ‘투표참여, 금품향응 거부, 선거부정 고발’, ‘관권개입 근절, 공정보도 실현, 금품향응 거부’ 등의 스티커를 만들어 수백만장을 보급했다.

그리고 어찌보면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스티커 배부운동은 실제 엄청난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를 테면 공선협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는 아파트 단지에는 현금봉투가 돌려지지 않았다. 누가 공선협 회원인지 몰라 고발당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공선협의 중요한 사업은 부정선거 고발창구 활동이었다. 물론 고발창구 활동은 한계를 갖는다. 예컨대 대통령선거를 예로 들면 제아무리 선거법 위반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

또 현행법으로는 어떤 후보가 선거부정을 저지르고 있어도 선거부정을 하고 있다는 걸 입증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도 문제였다. 기초 및 광역선거 때의 예인데, 누구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운동을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해두고 있어 어느 한 후보가 뻔질나게 선거부정을 저질러도 이 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고심끝에 찾아낸 방법이 ‘어느 구의 누구누구 후보가 이러이러한 일을 했다는 고발이 들어와 있으므로 이런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알려주기 바란다’는 전단을 뿌렸다. 유권자들이 간접적으로라도 선거부정을 저지르고 있는 후보를 알 수 있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런 사실만으로도 공선협 회원이 어느 한 후보를 반대하는 운동을 폈다는 명목으로 입건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우리로서는 선거부정을 감시하고는 있지만, 부정을 저지르는 후보를 응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선관위에 고발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유권자들에게 그 당시에 알릴 수 없어 사실 큰 의미가 없었다.

그래도 그 당시 공선협에 참가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다. 아침에 누군가가 고발을 하면 여야를 막론하고 곧바로 선관위에 고발했다.

또한 경실련에서는 공선협 운동과는 별도로 어떤 후보가 좀더 개혁적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에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책켐페인을 벌였다.

특히 총선과 대선 때 경실련에서는 경실련 자체의 정책을 만들고 그것에 입각해 각 정당의 공약을 분석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각 정당의 정책을 분석한 결과를 유권자들에게 선전했다. 물론 이때에도 어떤 정당을 지지하기 위한 입장에 서지는 않았다. 다만 소속 정당에 관계 없이 정책에 대해서만 평가를 내려 사람들에게 그 결과를 알렸을 뿐이다.

나중에 선관위에서 각 정당 정책을 평가한 자료를 홍보하는 것이 선거법에 걸린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지만, ‘국민들에게 각 정당의 정책을 설명하고 어떤 것이 좀더 개혁적이고 올바른지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게 선거법에 걸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 투표를 하는 국민들이 후보자가 내세우는 정책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해명도 하고 항의도 해서 결국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공선협이 공명선거를 위한 여러 활동을 열심히 폈지만, 각 후보들의 선거부정은 감시망을 뚫고 어떤 식으로건 실행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속 내용은 잘 모르는 채로 눈에 보이는 선거부정만이라도 열심히 고발해 공명선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국민에게 알리는 방식으로 일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모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공선협활동이 결국엔 사람들로 하여금 ‘투표를 바르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사실을 일깨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결과 공선협 활동은 시민운동 사상 아주 찬란한 성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결국 시민운동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91년 9개의 단체로 시작된 공선협은 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때에는 무려 5백여개 단체가 참여했다. 그리고 전국 70여개 도시에 공선협이 조직되었다. 나는 91년 공선협을 처음 만들 때부터 94년 선거 때까지 사무처장을 맡았다가 95년에 YMCA의 김성수씨가 사무처장직을 이어받아 지방자치단체장선거를 치렀다.

공선협은 짧은 시간에 거대한 전국 조직을 만들어 공명선거운동을 펴다가 선거가 끝나면 휴면으로 들어가는 조직이다. 그리고 다시 선거가 있으면 또 다시 ‘공선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우리사회의 공명선거를 이끌었다.

이처럼 공선협의 조직 자체는 선거 때만 한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었지만, 공선협에 모인 3-40개 단체가 중심이 되어 정의로운사회를 위한 시민운동협의회(약칭 정사협)를 만들었고 이 단체는 그 다음에 시민단체협의회(약칭 시민협)로 발전했다.

말하자면 공선협 활동에서부터 시작된 시민운동단체들의 연대활동이 결국 시민운동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주었고, 지금에 와선 공고한 동지적 결속을 갖는 그런 유대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내가 처음 공선협 운동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경실련 안에서는 반론도 있었다. 경제정의 단체인 경실련에서 왜 공명선거 운동을 하느랴는 의견이 그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그때가 한창 수서사건이 터져 경실련이 가장 먼저 데모를 해서 그 소식이 사회면 톱뉴스로 나오고 그럴 즈음이었는데, 나는 그런 경실련의 모습이 한편으로는 중산층들에게 강경이미지를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경실련이 데모만 하는 단체로 비쳐지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을 적절하게 중화시키려면 공명선거 캠페인과 같이 양식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운동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또 한편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정보사 사기사건’이 터졌을 때 경실련은 당연히 데모를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알뜰가게를 개설해 중산층들이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는 운동을 펴나갔던 이유도 그때문이었다.

온건한 운동과 비판적이고 날카로운 운동을 항상 병행해야 많은 시민들에게 ‘경실련은 편하게 참여하고 지지해도 좋은 운동이구나’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또 하나 내가 공선협 운동을 하면서 깨달은 중요한 점은 우리 국민의 놀라운 저력이었다. 실제로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선거문화를 그 정도로 빨리 고칠 수 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저력을 가진 국민이라면 지역할거주의와 3김 중심의 맹주정치를 종식시키고 정치개혁을 이뤄낼 수 있겠다는 믿음을 갖기도 했다.

실제로 4년전과 지금의 선거풍토를 비교해보면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후보측의 금품향응의 제공은 말할 것도 없고 유권자들의 금품향응 요구도 예사였던 과거와 비교해 보면 지금의 선거풍토는 그야말로 놀랄만한 변화다.

그리고 그 놀랄만한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던 것이 시민이 주체가 된 공선협 활동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