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01-07 15:57
   <허화평의 음모>에서 <미인계를 조심하시오>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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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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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화평의 음모


내가 경실련을 시작할 때 갖고 있었던 원칙 가운데 하나는 ‘경실련을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과거 산업선교활동이나 도시빈민지역에서 야학을 할 때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그런 활동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그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경실련 운동을 시작할 때 먼저 이런 다짐을 했다.

‘누구든지 나에게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면 절대로 외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도와 주자. 경실련의 문턱을 낮춰 누구든지 나를 만날 수 있고 경실련에 와서 편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하자’

물론 이러다 보니 중요한 일이 있는 데도 소소한 작은 요청이나 방문객에 시간을 빼앗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약간 무리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다.

한번은 어느 운전기사가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호소해 그것을 해결하느라 며칠간을 동분서주했던 적도 있다.

이러다 보니 경실련에는 자신의 어려움이나 문제거리를 해결해달라고 찾아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항상 끊이지 않았다. 석촌호수 노점상들에서부터 서초동 꽃동네 주민, 남태령고개에 있는 도시빈민, 약사, 한의사, 군인, 외국인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어느 직업, 어느 지위의 사람에 관계 없이 경실련 문을 두드렸고, 이들 대부분이 ‘빈손으로 내쫒김을 당했다’는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경실련에는 또 하나 중요한 원칙이 있었다.

누구나 경실련에 와서 도움을 청할 수 있지만, 경실련에서 구체적인 성명을 발표하거나 조치를 취할 때는 반드시 사전에 충분한 조사연구를 한다는 점이다.

가능하면 신문에 난 자료나 통계도 반드시 확인과정을 거쳤다. 신문에 나는 정보 가운데는 확정되지 않은 ‘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기관이나 기업에 대한 비판성명을 내기전에 반드시 반론권을 주어 사전에 사실여부를 철저하게 확인토록 했다.

그런데 이런 원칙을 지키기가 어려운 때가 가끔 있다. 예컨대 이지문중위가 군부재자선거부정을 폭로한다고 해서 그 사실에 대한 진위여부를 군부대에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포항제철 사건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었다.

공선협 활동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울산에서 포항제철 노동자 세 사람이 올라와 포항제철이 당시 민자당 후보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직장을 걸고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우리를 찾아온 셈이다.

나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 상당히 낙담했다. 그 이유는 포항제철이 그 당시 잡지 ‘경제정의’에 광고를 실어준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경실련에 지속적인 재정지원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당시 박태준 회장은 경제정의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높은 분이었다. 내가 직접 만나서 그분의 생각을 확인할 기회도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경제정의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높았고 경실련운동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내주셨다.

그런데 이런 포항제철을 공격하는 양심선언을 하겠다니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그들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다는 심증도 생겼다.

우리는 이럴 때 대개 직접 당사자인 포철에 전화를 걸어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그들의 반론도 충분히 들어본 뒤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내린다. 하지만 이런 사안은 당사자에게 확인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확인하고 나면 포철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언론에 이것을 막을려고 애를 쓸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들 포철노동자들의 좋은 뜻이 꺾이고 만다면 큰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직장을 잃어도 좋다’는 각오로 경실련을 찾아온 이들의 신뢰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경실련이 ‘사실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포철에 그사실을 알린다면 그 노동자들은 알고보니 경실련은 회사편이로구나 하고 실망할 것이다. 나는 고심 끝에 이들에게 기자회견을 열어 양심선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자 마음이 한편으로는 무거웠다. 한마디로 포철이 보기엔 내가 정말로 의리없는 사람으로 비칠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경실련을 그렇게 도와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는 포철사람들의 볼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같았다.

또 한편으로는 가뜩이나 곤란을 받고 있는 경실련의 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들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사람들에게 ‘당신네들이 나를 정말 어려운 곤경 속으로 몰아 넣고 있다’는 얘기를 한탄조로 하기도 했다. 참으로 정의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옛날에는 감옥갈 용기만 있으면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정의의 편에 서기가 더욱 어렵다. 의리를 저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지 않으면 정의를 지킬 수 없을 만큼 인간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들이 포철이 선거개입한 사례를 공표하도록 했는데, 그러고 나자 잠시 뒤 공선협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포철 사람이 달려와 자신들은 선거에 개입한 일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이미 포항제철과 민자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노동자들은 명명백백하게 선거개입을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가 다 끝난 후에 포철의 이대공 부사장께서 이번의 양심선언이 허화평 후보측의 음모에 의한 것이고 실제로 양심선언을 했던 세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것은 자신들이 거짓으로 꾸며낸 일’이라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허화평 후보 진영에서 돈을 주고 이들을 꼬여 거짓말을 하게 한 것이다.

포철측은 우리에게 그 노동자의 고백을 통해 허후보 진영에서 이들을 어떻게 회유하고 작전을 짰으며, 그 전날 어느 호텔에서 잠을 자고 무슨 의논을 한 뒤 경실련에 찾아오게 되었는지에 관한 증거물을 모두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 사람들이 찾아 왔을 때 이것을 차분하게 규명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내가 정의롭게 행동하려면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하는 실존적인 고민에 너무 빠진 나머지 상황을 치밀하게 규명하려는 노력을 소홀히했다는 반성이 들었다. 만약 치밀하게 규명하려고 조사를 했다면 아마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뒤 허후보 측의 고소로 포철의 선거법 위반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재판이 열렸는데, 나는 포철 관계자들에게 ‘만약 재판 과정에서 포철이 잘못이 없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면 우리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겠다’고 얘기했다.

재판 결과 허후보측의 공작사실이 다 드러나 포철은 결국 경주지청에서 무혐의판정을 받았다.

재판 결과를 듣고 나는 이 사실을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실행위원회에 보고한 뒤 공선협이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입장을 발표하자는 의견을 말했다. 다른 위원들도 모두 동의해 결국 우리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서신을 포철에 보냈다.

당시 시사저널이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시민운동’이라며 우리의 행동을 거꾸로 칭찬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당시 포항 시민들과 포철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 포항의 시민단체들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 뒤 내가 포항에 내려 가자 시민들이 이 사실에 대해 해명해달라는 요청을 해서 상세하게 해명을 해주기도 했다.

한참 지난 뒤 허후보측에 매수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폭로한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도 ‘자신이 했던 기자회견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었다. 너무 괴롭다’는 내용의 편지를 내게 보내기도 했다.

우리는 그 때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정의롭게 대처한다’는 경실련이 갖고 있는 좋은 뜻을 허후보측이 자신들의 선거전략에 교묘하게 이용한 사실에 매우 분개했고 이런 방식으로 국회의원이 된 것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포철에 대해 굉장히 미안한 마음을 가졌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자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잘못한 것은 솔직히 인정하자’는 생각으로 잘못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그런 용기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동이 되었던 것 같다.

지난 94년 2월 제4차 회원 총회에서 발표한 ‘경실련 회원의 다짐’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사회자가 “제 아무리 옳은 주장을 해도 인간의 부족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깨달았을 때가 더 중요합니다”라고 말하면 회원들이 “정직하게/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오히려 우리의 공신력을 높혀 줍니다”라고 뒤따라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 보내지 않는 따뜻한 마음’, ‘대기업의 로비나 설사 경실련에 불이익이 생길 우려가 있어도 정의를 말할 줄 아는 용기’, ‘한 편의 의견에 치우치지 않고 갈등하는 양쪽의 의견을 듣고 치밀하게 조사해서 결론을 구하는 불편부당한 태도’.

경실련은 이런 원칙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지렀을 때는 과감하게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이 것이 경실련을 신뢰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어 준 힘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김일성 조문파동과 취소성명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우리 사회에 이른 바 조문파동이 일어 났을 때 경실련안에서도 ‘조문파동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둘러 싸고 논란이 있었다.

나는 그 때 “침묵을 지키자. 가능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말자”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조문찬성 입장을 발표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았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논란 끝에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단 뒤 조문 찬성입장을 밝히기로 했다.

‘우리는 김일성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6.25를 일으킨 장본인이고 KAL기폭파 사건 등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만행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민족의 장래와 화해와 통일을 생각할 때 조의를 표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남한에서 조문행사나 추모행사를 갖는 것, 북한에 조문단을 파견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만 정부차원에서 조의를 표하는 것 자체는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이런 조건을 전제로 ‘조문찬성’ 성명서를 냈다.

그런데 언론이 전제조건을 담은 앞부분은 거두절미해버리고 ‘경실련이 북한에 조의를 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사실만 보도해 버렸다. 게다가 어느 일간지의 경우 경실련에서 발표한 성명을 실은 기사 바로 앞부분에 한총련에서 조문상을 차려 놓고 학생들의 조문을 받는 사진과 기사까지 큼지막하게 실었다.

그러자 경실련 사무실이 순식간에 난리법석이 됐다. 항의전화 쇄도했다.

모 신문의 경우 아예 ‘경실련이 조문단 파견을 지지하다니’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실었다. 물론 우리가 곧바로 신문사에 항의해 결국 정정보도가 나갔지만, 이미 수십만명의 사람이 사설을 읽은 뒤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공동대표 세분께서 ‘성명서를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결국 논란 끝에 조건부로 냈던 성명서를 취소하고 말았다. 실제로 공개적으로 취소성명을 다시 냈다.

그동안 경실련은 내부 의견이 엇갈릴 때에는 대체로 침묵하는 방법을 택했었다. 그런데 ‘조건부 조문찬성 성명서’의 경우 의견의 완전한 일치가 없이 공식적인 의견을 밝혔다가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되고 급기야 취소 성명까지 내게 된 것이다.

취소성명을 내고 나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취소한 것이 잘못 되었다.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갔어야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취소성명을 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른바, ‘조문성명 취소파동’을 겪으며 여론이 둘로 나뉘어져 있을 때 객관적인 입장에 서서 정론(正論)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새삼 절감했다.

예컨대 여론이 둘로 나뉘어졌을 때 사람들은 어떤 주장이 나오면 각기 자신들에게 유리한 시각으로 해석해 버린다. 언론의 경우에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논조에 맞는 부분만 골라서 보도한다. 따라서 설사 갈라진 여론을 하나로 모을 정론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관철시키기가 그만큼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조문파동이 한창일 때 일부에서 ‘아무에게도 득(得)이 되지 않는 무익한 조문파동을 빨리 집어치워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내가 보기엔 아주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그 당시 우리가 만약 무익한 조문논쟁을 빨리 집어치워라’고 성명을 냈다면 훨씬 공감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 경실련이 여론의 표적이 되자 그 순간 경실련의 힘이 약화되고 말았다.

그 당시 경실련에서는 지하철노조원에 대한 처벌강도를 약화시키기 위해 정부와 열심히 교섭을 벌이고 있었는데, 정부가 우리 말을 들어주지를 않았다. 한마디로 경실련의 힘이 약해져버린 것이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한가지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경실련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발언을 할 때엔 수위를 정확하게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구나. 어느 정도까지 발언을 하면 힘을 가질 수 있지만, 거기에서 한발짝만 더 나가면 발언의 힘이 약해지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컨대 좀더 진보적이고 과격한 주장은 얼핏 듣기엔 힘이 있는 것같지만, 사실은 그것은 현실적인 힘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국민적인 합의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가장 정확한 발언을 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하고 실질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많은 시민들의 참여와 지지가 필요한 시민운동을 해나가는 내게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었고, 그 다음부터 어떤 민감한 사안이 생겼을 때 ‘과연 국민의 합의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게 해주는 값진 교훈이 되었다.

물론 어떤 경우엔 국민적 합의는 없지만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 만약 그럴 때에도 경실련이 국민의 눈치만 보고 있다면 그것은 비판받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이인모노인 북송문제의 경우 재야에서 문제 제기를 했지만, 처음에는 국민적 합의가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설사 한완상박사가 통일원장관이었다고 하더라도 혼자 힘으로 이인모노인을 북한으로 송환하는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인모 노인을 북의 가족에게로 보내주자’는 서명운동을 준비하였고, 여기에 변형윤, 강문규, 이세중, 강원룡 등 어른들이 동참해주셨다

이런 주변의 지원을 통해 국민적 합의가 서서히 ‘이노인을 가족의 품에 돌려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에따라 한완상 통일원장관도 이노인의 북한송환을 힘있게 추진할 수가 있었다.

말하자면 이 경우는 공신력 있는 단체와 우리사회를 이끌어 가는 존경받는 어른들이 국민적 합의를 거꾸로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처럼 좌우이념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에 관해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경우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동참이 문제해결을 한결 수월하게 해준다. 게다가 운동권의 시위보다는 시민들이 벌이는 시위가 정부에게 훨씬 큰 압력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우리는 정부에 대한 규탄시위를 할 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운동권이 아니라 보통시민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많은 시민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국민적 합의에 바탕을 두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결국거꾸로 다수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서경석씨는 두개의 얼굴을 가졌어요


내 처와 연애하던 시절 처가 내게 “경석씨는 두개의 얼굴을 가졌어요”라고 말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내게 순진하고 천진난만하고 티없이 맑은 얼굴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냉혹하고 단호하고 철저하게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는 얼굴이 있다는 얘기였다.

돌이켜 보면 실제로 내게 그런 상반되는 두 개의 모습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순진하고 천진한 얼굴은 사실 나의 본래 얼굴이었다. 그런데 내가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이고 혁명가로 살겠다고 결심한 뒤 내게 냉혹하고 단호한 또 다른 얼굴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나는 한 때 테러리스트를 꿈꾼 적이 있다. 나는 그 시절 내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자유주의적 품성을 청산하려고 애를 쓰면서 철저한 혁명가가 되려고 노력했다. 감정에 좌우되지 않고 감성을 억제하고 혁명적 의지로 완전히 무장된 삶을 살려는 그런 노력이 내 청년 시절의 모습이었고, 그런 점에서 나는 70년대를 이런 두 얼굴이 함께 가진 상태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내 두 얼굴이 만들어 낸 후회스러운 경험이 하나 있다.

내가 기독청년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던 70년대에 기독교운동을 하던 한 후배가 나를 찾아와서 농민운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나는 흔쾌히 그 말을 받아들이고 그 후배가 전라남도의 한 농가에서 머슴으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런데 그 후배가 그곳에 가서 얼마 견디지 못하고 한밤중에 도망을 쳐서 서울로 올라 왔다.

그 당시 재야운동, 민중운동의 풍토 속에서는 운동의 현장에서 도망쳐서 서울로 돌아왔다는 것은 매우 부끄럽고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 후배에게 “그렇게 어려웠다면 야반도주를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의논하면서 처리할 수도 있지 않느냐”며 야단을 쳤다.

그런데 그 후배가 공교롭게도 그날 밤 머리가 이상해져서 그때부터 조울증에 걸려 버린 것이다. 실제로 그후배는 그 뒤부터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1년에 한차례씩 정신병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 후배가 내 말만으로 조울증에 걸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것은 두고 두고 내게 후회로 남았다.

‘한밤 중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면서 자기 스스로가 겪었을 마음의 고생이 얼마나 컸겠는가. 만약 그때 내가 후배의 그런 마음을 헤아려 따뜻하게 위로해주었다면 그처럼 상태가 나빠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그뒤 그와 함께 놀아주기도 하고, 극장구경을 함께 가기도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갚으려 애썼지만, 그런다고 갚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 후배를 생각할 때마다 내게 큰 아픔으로 남았다.

듣기로는 그 후배가 병이 완치되지는 않았지만,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서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다.

이밖에도 돌이켜 보면 청년 시절 나는 사회운동을 한다면서 실제로는 인간을 비인화시키는 일을 했던 적이 많았다. 물론 추구하던 혁명의 목표는 ‘인간해방이 실현된 공평한 사회’였지만, 혁명이라는 것이 워낙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 탓에 그 과정에서 인간성의 왜곡,비인간화 현상이 불가피하게 일어 나곤 했다.

실제로 그 당시엔 경찰이나 정보부가 프락치를 집어 넣어 운동을 파괴하려던 일이 많았기 때문에 기독교운동에서조차도 끊임 없이 프락치와 싸움을 벌여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첩자가 아닌 사람이 첩자로 몰려 고통을 겪은 사람이 많았다.

또한 운동을 이끌다 보면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후배를 감옥에 가도록 지시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줄을 알면서도 냉혹한 비판을 가해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했다. 때문에 나와 함께 청년 시절에 함께 운동을 했던 후배들 가운데에는 내게 애증(愛憎)의 마음을 갖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라는 반성도 있다.

때문에 나는 미국에서 복음주의 신앙으로 되돌아 오면서 지난 날 이런 부족한 부분, 비인간적인 부분에 대해 뼈저린 반성과 회개의 시간을 가졌고, 앞으로는 절대로 인간을 수단화하는 운동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인간 중심의 사회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우리나라 운동권의 상황은 내가 사회운동을 하던 70년대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 중심의 운동’과 거리가 멀었다.

사실 나는 미국유학을 떠나기 전이나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늘 한국에 돌아가면 다시 사회운동을 하겠다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미국에서 돌아온 뒤 운동권 집회에 참석하고 대학가를 돌아보면서 그 당시 운동권에 재적응하려고 무척 노력을 했다.

하지만 집회에서 내가 받는 느낌은 ‘어, 이게 아닌데..’하는 마음이었다.

우선 집회에 참석해 슬로건만 들어도 섬찍한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예를 들면 ‘미제국주의자의 가슴에 비수를 꼽자’라든가 ‘미제국주의자의 각을 뜨자’라든가 하는 말을 듣고 ‘과연 내가 앞으로 이런 운동을 할 수 있겠는가’하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미국에서 목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왔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하는 내가 ‘사람의 각을 뜨는 운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될 법한 일인가. 그러고서 어떻게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목사이면서 동시에 운동권이 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 바램은 88년 그때의 상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내 머리 속에 화두처럼 떠오른 성경구절이 바로 로마서 12장 21절에 나오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구절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해 보았다.

‘너는 진실로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하지만 확신이 없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는 없어. 악과 싸워 이길려면 필요악이 필요해’

그러면 또다시 내자신에게 반문했다.

‘성경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셨는데, 성경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내가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어떻게 목사로서 신도들 앞에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군다나 어떻게 부활신앙을 증언할 수 있는가’

말하자면 이 고민은 내가 ‘목사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즉 나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였다.

나는 도무지 해답이 보이지 않는 이 질문을 그대로 안고 88년 한 해를 보냈다.

그리고 89년 기사연 실무자들의 스트라이크를 만난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를 따르던 사람이 나를 적대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제는 정말 결단을 내려야겠다. 다시 저런 식의 운동을 해서는 안되겠다. 필요악에 기초해서, 아니 증오에 기초해서 운동을 하는 일은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다’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선(善)으로 악(惡)을 이기는 운동을 해야겠다. 목표 뿐만이 아니라 방법까지도 선하게 해야 겠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정말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을까? 이기지 못할 가능성이 오히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길을 갈 때만이 신나고 확신에 차고 실패해도 후회가 없기 때문에 내겐 이길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리고 참된 선 앞에서 상대방은 자연히 무릎에 힘이 빠져 스스로 주저앉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은 경실련의 중요한 운동의 원칙이 된다. 특히 나는 그 후부터 우리가 하려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은 기업주든 부자든 안기부 직원이든 정부 관리든 상관하지 않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발기선언문도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힘을 모으려는 세력은 소외되고 억압된 민중만이 아닙니다. 선한 뜻을 지닌 가진 자도 이 운동의 중요한 주체입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면 그가 기업인이든 중산층이든 할 것 없이 이 운동의 중요한 구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결심을 하고 난 뒤 나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특별히 사람 사귀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 나는 사람을 사귈 때 그 사람의 출신 성분을 가려서 사귀었다. 예를 들어 부자면 관심을 두지 않았고, 가난한 노동자, 농민의 아들, 혹은 집안에 과거 인민군에 부역한 경험이 있는 집안의 아들, 좌익집안의 아들 등 이런 사람들과 주로 사귀었다. 출신 지역으로 따지면 내게는 호남출신 친구들이 가장 많았고, 서울공대 동창들은 운동을 하는 동안 거의 만나지 않았을 정도다.

내가 주로 이런 사람들을 골라서 사귄 이유는 우선 이 사람들은 조직화를 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그당시 내 관심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더 많이 조직화해서 혁명을 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잘 사는 사람과 사귀는 것 자체가 내게는 시간 낭비였다.

그런데 경실련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오히려 부자가 경제정의운동에 동참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훨씬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고,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가리지 않고 ‘우리 이 운동을 함께 합시다’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몇가지 놀라운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새문안교회 장로 가운데 아주 부자인 분이 있는데, 청년 시절에 나는 이분이 내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속으로 괜히 경멸하고 적대시하곤 했었다. 왜냐하면 그분이 기업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실련을 시작하고 난 지 얼마안되었을 때 그분이 날더러 만나자고 하더니 “나는 기업주이기 때문에 땅을 한평이라도 더 갖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서목사가 하는 운동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운동이기 때문에 내가 돕지 않을 수가 없다”라고 말하면서 경실련 활동에 보태쓰라며 상당한 경제적 도움을 주셨다.

내가 젊은 시절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자본가라고 경멸했던 분이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 거꾸로 그 일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런 경험은 그밖에도 많았다.

나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선한의지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옳은 사람이지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구나. 내가 젊은 시절 계급이론에 빠져 부자를 무조건 나쁘게 생각했던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시민운동을 시작하면서 나는 철저하게 계급적 입장을 버리게 되었다. 물론 이런 나의 변화의 출발은 사회주의혁명이 불가능하다는 나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을 해나가는 동안 나의 인간이해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을 하겠다는 이 원칙은 그뒤 경실련 활동을 하면서 몇가지 신화적인 일들을 만들어 내 주었다.



철거를 거부하던 철거반원들


경실련 초기에 서초구의 불법 비닐하우스에 사는 빈민들이 경실련에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도시빈민들이 도움을 요청한다고해서 무작정 돕지는 않았다. 왜냐면 그당시 빈민들 가운데는 정말 오갈 데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투기 때문에 비닐하우스에 사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오갈 데 없는 빈민들은 지하실 방 한칸이라도 얻을 수 있는 배려를 정부에서 해줘서 길거리에 나앉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정부에서는 그런 대책 없이 무조건 철거를 강행한다는 방침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빈민들에게 “만약 여러분들이 아무런 대책 없이 철거 당하면 그때는 경실련 사람들이 직접 나가서 몸으로라도 막아서겠다”고 한적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 시장과 면담을 하면서 ‘경실련은 대책없는 철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뒤인 90년 5월 서초구 신원동의 그린벨트지역내에 있는 비닐하우스주민들이 내게 ‘지금 비닐하우스가 철거 당하고 있으니 빨리 좀 도와달라’는 내용의 전화를 걸어 왔다. 무척 다급한 목소리였다.

전화를 한 주민은 언젠가 내가 “몸으로 막겠다”고 한 사실을 기억해내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는 그 전화를 받고 다른 약속을 다 취소하고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런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감옥을 여러차례 가긴 했지만 이 나이에 또 잡혀갈 생각을 하니 한심하다는 느낌도 있었다. 경실련에 연락하여 경실련 도시빈민협의회 회원들 10명 가량도 함께 오게 했다.

도착해 보니 그곳에서는 이미 10여 가구가 철거를 당했고, 계속 철거를 강행하려는 철거반원과 주민들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져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우리는 그곳에 도착하자 마자 철거반원들과 주민들 사이에 한줄로 늘어섰다.모두 대책없는 철거를 반대한다는 띠도 둘렀다.

주민들과 몸싸움을 벌이던 철거반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 보았다.

이때 내가 조용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태까지 도시빈민들이 아무런 대책없이 철거당하고 그것을 몸으로 막으려다 부상당하고 심지어 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당하는 모습을 집에서 신문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이 국민소득 6천불 시대에 아무런 대책없이 길거리에 나앉는 서울 시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태까지 나는 집에서 이런 걱정만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직접 철거현장에 나왔습니다. 이곳에 직접 나와서 여러분들에게 ‘서울시민들의 뜻이 이렇다’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지금 내가 여러분들의 앞을 몸으로 막고 있는 행동이 공무집행 방해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철거를 강행하려거든 먼저 나를 잡아 가두십시오. 그리고 나서 철거를 계속하십시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다.

철거반원들이 30~40미터 뒤로 물러서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꼼짝하지 않았다. 당황한 시청직원이 철거반원들에게 마구 뭐라고 해도 들은 체도 않고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때 철거반원들이 2~30명 가량 되었는데, 그 뒤 알고 보니 이 사람들은 하루 일당을 받고 새마을 취로사업을 나온 사람들이었다.

당황한 시청직원들이 경찰에 연락을 했지만, 경실련 회원들 때문에 철거가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경찰에서 자기들은 나올 수가 없다는 전갈을 보내오는 것같았다.

그러자 시청직원이 우리에게 다가와 사정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제발 우리 서울시 체면 좀 살려주십시오. 목사님이 먼저 물러가 주시면 우리도 곧바로 철수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런다면 아무런 염려 없습니다. 철거를 안하겠다는 약속만 지킨다면 지금 물러나 드리지요”라고 말하고 뒤로 물러섰고, 곧 이어 시청직원들도 서둘러 그 자리에서 철수해버리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한동안은 어디서 철거만 일어났다 하면 주민들이 경실련에 도움을 청하는 통에 그때마다, 나는 철거현장에 나가 두세시간씩 몸으로 막아서고 그러면 철거반원들이 오다가도 다시 돌아가곤 했다.

그 뒤부터 철거가 있을 때에는 시청에서 경실련에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서 ‘이번엔 몇 집 철거하는 것인데, 이미 다 예정되고 있는 것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이해를 해주십시오’라거나 ‘이번 건은 대책이 있는 것이니 오지 않으셔도 되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얘기를 듣고 상황을 판단해 현장에 나가거나 나가지지 않거나 했다.

어찌 보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고 한편으로는 참 우습기도 한 풍경이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한동안 벌어졌다.

나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구약성서를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얘기가 나온다. 점령하는 방식이 성스러운 물건들이 들어가 있는 법궤를 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에 한바퀴씩 여리고성을 돌다가 일곱번째 날 일곱바퀴를 돌고 ‘와~~’하고 소리를 지르자 여리고성이 그냥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는 얘기이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그야말로 옛날 얘기지만, 나는 어릴 적에 주일학교에서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채로 그냥 재미있는 성경이야기로 열심히 듣곤 했다.

그런데 철거반원들과의 경험을 겪은 뒤 이 성경구절이 ‘아! 그 여리고성을 깨뜨리는 이야기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구나, 진리의 말씀이구나’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여호수아의 세력이 너무나도 옳고 진리에 입각해 있어 하나님이 그 편에 서 있으면 여리고성이 스스로 무릎에 힘이 빠지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는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이 기독교 운동의 참된 모습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참된 기독교운동은 얼마나 강력하게 투쟁하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운동이 얼마나 영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 다시 말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감동 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 사회를 정말로 바꿀 수 있는 힘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선한 의지’의 힘이라는 깨달음을 경실련 운동을 하면서 뜨겁게 체득하게 된 것이다.



안기부 직원의 고백


내가 한창 도시빈민들을 돕는 운동을 할 때 한번은 그 지역 정보과 형사와 함께 저녁을 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형사가 나를 보더니 대뜸 “저는 목사님을 참 존경합니다”라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얘기를 듣고 사실 상당히 놀랐다.

‘정보과 형사가 나를 존경한다니. 정보과 형사가 누군가. 젊은 시절 나를 잡아가서 조사하고 온갖 인격적인 모욕을 주었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리고 나를 졸졸 쫒아 다니면서 감시하고 가택연금하고 어떤 때는 공갈협박까지 했던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경실련에 잠깐 출입한 적이 있는 한 안기부 직원이 나한테 “목사님을 존경합니다”하고 말했다. 이때는 내가 정말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내가 뭐 잘못된 것이 없는가고 생각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온건한 시민운동을 시작하고 있다기로서니 이래뵈도 내가 과거에 감옥을 세차례나 간 내노라하는 재야운동가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어용이 되어 안기부 직원의 존경을 받게 되었나?”

하지만 잠시 뒤 나는 한가지 커다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만약 우리가 정말 옳고 진리에 입각한 운동을 한다면 설사 그 운동과 정반대 입장에 놓여 진 사람이라도 그 운동을 향해 지지와 존경을 보낼 수밖에 없구나. 그리고 자기가 존경하는 운동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댈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라는 깨달음이었다.

실제로 과거 노태우 정권 당시부터 경실련 담당 안기부 직원이 있었다. 말하자면 이 분은 경실련 활동을 감시하고 정보도 캐내고 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을 만날 때 ‘저 사람이 우리를 감시하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으로 만나지 않았다.

나는 교회에서 교인을 만나는 자세로 그 직원과 만나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비록 안기부 소속 직원이지만, 그 사람과 신뢰를 저버리는 일을 해본 적이 없다.

물론 어떤 경우 불가피하게 우리의 모든 것을 그대로 공개하지 못한 적은 있었지만, 그 사람을 이용하거나 뒤통수를 치거나 하는 일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그 직원은 안기부 안에서 ‘경실련 운동의 실체는 이런 것이다’라고 납득시키고 일깨우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곤 했다. 경실련이 노태우정권 당시에 정부의 탄압을 받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런 안기부 직원의 자발적인 경실련 변호도 틀림없이 상당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경실련은 노태우정권 당시만 해도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재야단체 못지 않게 맹렬하게 공격을 했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우리는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을 함께 제시하고 합법적으로 운동을 전개했다는 것뿐이다.

때문에 정부 안에서 일부 강경론자들은 ‘왜 경실련을 가만 놔두느냐’는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기부에도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있고, 그들이 우리의 운동에 공감했으며, 그들이 나서서 경실련을 보호했다고 볼 수있다.

물론 이런 태도는 옛날의 운동권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기회주의적 행동이다’, 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자기가 하는 운동의 도덕적, 정신적 힘이 강해서 상대방까지 압도할 수 있어야 이기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밖에도 경실련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무척 많았다.

한번은 내가 어느 날 선배목사님인 김용복박사에게 이런 경험을 들려 주었더니 그가 동독에서 만난 한 목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내게 들려 주었다.

동독이 붕괴될 당시 라이프찌히의 어느 교회 바깥에서 촛불시위가 시작됐는데, 그 시위에 나중에 십만명의 인파가 모여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이 촛불시위가 동독 전역으로 퍼져 나가 결국 동독정권이 무너지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런데 이 촛불시위가 자꾸 불어나니까 동독 정부가 발포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발포 명령이 밑으로 내려오다가 도중에 시민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어 버렸고, 때문에 시민들에게 경찰이 발포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엔 촛불시위가 전국으로 퍼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말하기를, 발포명령이 어디에서 시민을 보호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었는가를 지금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목사님께서 “시민들이 만약 평화적인 촛불시위를 하지 않고 폭력적인 시위를 벌였다면 과연 그런 결과를 가져왔겠느냐, 아마도 군인들이 아무런 마음의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 테고 시민들을 향해 결국 발포를 했을 것이다. 그러면 동독도 무너지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새삼 사람들의 선한의지가 모였을 때 발휘하는 엄청난 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경실련을 시작할 때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나의 신앙적인 결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비장한 태도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것이 사실이고, 이로 인해 경실련 운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사회운동은 ‘대립과 갈등을 기본 축으로 하는 운동’이었다. 사회주의 운동도 그렇고, 노동운동도 그렇다. 이런 운동들은 정의의 세력이 악한 세력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내가 하려 했던 운동은 악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는 큰 원칙하에서 어디까지나 선한 방식으로 싸운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경실련 운동을 하면서 이러한 운동방법론이 겉으로는 힘이 약한 것같지만, 그 속에 ‘사람을 끄는 힘’, ‘사람을 변화시키고 설복시키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사실을 실제 경험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후 세계교회협의회(WCC)가 경실련 운동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여 WCC주최 워크숍에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선한의지를 모아서 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내 생각이 나의 독특한 종교적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점차 전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으로 되고 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전세계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가지지 못한 자의 가진 자에 대한 증오를 조직화해서 가진 자의 것을 빼앗는 운동, 이것만이 사회적 형평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주의 혁명모델을 지향해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공산권의 붕괴현상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던 지식인들이 엄청나게 충격을 받고 변화되고 있다. 제3세계 사회운동도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가지지 못한 자의 가진자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전세계 지식인들이 점차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증오를 조직화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 정의의 힘, 양심과 도덕의 힘을 모아서 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겠구나, 이 길밖에 남은 길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내 개인적인 신앙적 결단으로 시작되었던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이 우리사회는 물론 전 세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회운동의 이념이 되고 있구나 하는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엘타야 세미나에서의 깨달음


경실련의 출범하고 두해가 지난 91년에 나는 엘타야 국제시민운동단체가 주최한 ‘개발과 환경’(Development and Environment)이란 주제의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프로그램의 핵심 내용은 ‘어떻게 하면 환경을 해치지 않고 경제발전을 이룰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이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경실련이 지금까지 어떻게 경제를 바르게 발전(Development)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을 집중하다 보니 어떻게 하면 환경을 해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너무 소홀했다는 커다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경제발전을 이야기 할때 ‘정의로운’경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지속가능한’경제도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뒤부터 환경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결국 경실련의 목표도 초기의 목표인 경제성장, 사회적 형평에 환경보존을 하나 더 추가해 세가지로 수정해 환경운동을 활발하게 펴나갔다.

그리고 두해가 지난 뒤에 나는 이 세가지 목표만으로는 안되고 여기에 정신적 성숙이라는 목표를 하나 더 추가해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어느 나라의 사회체제든 그 체제를 지탱해주는 정신적인 힘이 약화되면 유지될 수가 없다.

예컨대 어느 나라가 사회복지를 실현하려면 그 나라 국민들 사이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대한 사랑의 마음이 가득차서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또한 사회복지제도가 도입된 뒤에도 이런 국민들의 생각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일단 사회복지제도가 도입되고 나면 사람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돕기 위한 우리 할일은 끝났고 이제는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니 우리는 세금만 많이 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다음에는 점점 이웃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고 갈수록 개인의 행복추구에만 관심을 집중한다. 결국 점점 이기주의적으로 변하게 되는 셈인데, 이렇게 되면 거꾸로 ‘내가 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이렇게 많은 세금을 내야 하지’라며 사회복지제도 자체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된다.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면 그 나라의 사회복지제도는 그 뿌리에서부터 와해의 위기를 맞게 된다.

따라서 모든 문제를 제도개혁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사회는 사회경제체제의 면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다. 사실 경실련이 추구하는 경제정의가 실현된 사회의 모습도 독일식의 ‘사회적 시장경제체제’(Social Economic Market System)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현재 독일은 나치가 새롭게 준동하는가 하면 유색인에 대한 차별이 심하고 실업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느 때인가 이런 현상에 대해 독일에서 온 사회경제체제를 연구하는 한 학자에게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그랬더니 그 학자가 “자기가 볼 때 독일은 사회경제체제에 근본적인 모순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독일체제는 훌륭하게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회체제를 지탱해주는 정신적인 힘이 고갈되고 있기 대문에 그런 심각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말을 들으면서 ‘제도개혁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새삼 절감했다.

나는 경실련을 시작하면서부터 경실련운동이 근본적으로 정신혁명운동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경실련에서 의식개혁운동을 하려고 했을 때 일부에서 ‘개량주의 운동이다’라고 기피하기도 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제도개혁과 의식개혁을 동시에 실천하는 운동이 지금 이시대에 필요하다는 점을 명백하게 밝혔다.

실제로 경실련은 그동안 공명선거캠페인, 근검절약운동, 작은차 타기운동 등 의식개혁운동을 많이 펼쳤다.

그러나 아무래도 경실련 초기에는 잘못된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 시급했던 탓에 정신개혁운동에는 다소 소홀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독일 등의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면서 ‘우리가 계속 제도개혁만 중요하게 추진한다면 나중에 경제정의를 실현시키더라도 그 사회가 항구적으로 지속되기가 어렵겠구나’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뒤부터는 사랑 실천 운동 등 의식개혁운동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특별히 이웃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시간을 쓰는 것, 예를 들어 양로원을 찾아서 밥해주고 빨래해주거나, 장애인들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빨래를 해주고 밥을 떠주는 일 등이 그것이다.

재작년에 일본에 갔을 때 연세가 많으신 재일교포 실업인을 한 분 만난 적이 있다. 그 노인실업가는 큰 회사의 사장이고 연로한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자기 동네에서 일년에 몇십시간씩을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사실 시간의 효율성만 놓고 따진다면 그 노인이 그 지역에서 몇십시간을 봉사하는 것이 굉장히 아까운 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자신이 직접 봉사하지 않고 직원을 한 두명을 내보내거나 일당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시키는 것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 노인실업가는 직접 나가서 봉사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 이유를 묻자 “봉사하면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 노인에게는 이웃에 대한 봉사정신이 생활 속의 일부가 되어 있는 셈이다.나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정신과 실천하는 모습이 확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한 때 우리는 이런 식의 사회운동을 낭만적운동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큰 이유가 있다.

독재타도를 위해서 열심히 투쟁을 해야하는데, 캠퍼스에서 어떤 사람들이 변소청소를 열심히 하자, 휴지를 주웁시다라고 외치고 다닌다면 학생운동하는 사람들이 와서 ‘저놈들 정보부 프락치 아니냐’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모든 힘을 독재타도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문제의 초점을 흐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의식개혁, 자원봉사운동이 동시에 이뤄지지 않고서는 어떠한 제도개혁도 성공할 수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져가고 있다.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자원봉사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에는 경실련 전직원에게 크리스마스 앞뒤 사흘 동안은 경실련 일을 하지 말고 모두가 이웃돕기 운동, 즉 양로원,고아원을 찾아가서 그들을 도와주고 위로하는 운동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요청했다.

경실련에서 의식개혁운동을 펴나가면서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이제 우리도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의식을 넓혀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온 인류가 다 잘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어찌보면 남과 더불어 살고 우리 것을 남에게 나눠줄 아는 태도를 갖는 것이 경실련이 해나가고자 하는 의식개혁운동의 마지막 단계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경실련은 재작년부터 환경보존운동, 자원봉사운동에서 한걸음 나아가, 국제부를 만들고 가난한 다른 나라와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여러 사업을 진행시켰다. 물론 아직까지 우리나라 국민들 가운데도 못살고 억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제는 국내문제 뿐만 아니라 못사는 다른 나라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시민운동은 결국 제도개혁운동에서 의식개혁운동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 경실련이 제도개혁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국회가 아직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기개혁이 이루어 지고 우리 정치가 선진화되면 그런 제도개혁의 과제는 정부와 국회에 맡겨도 상관없는 시점이 올 것이다.

하지만 의식개혁운동은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맡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많이 경험했듯이 정부가 나서서 의식개혁운동을 해나가면 결국 관변운동이 되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은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식개혁운동은 시민운동의 자발적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 져야 하는데, 이럴려면 우선 앞장서서 이끄는 지도자들부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경실련을 창립한 다음 해에 잠롱시장을 초청한 적이 있다. 서울대학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 강연을 듣는 학생들의 호응이 굉장히 높았다.

어찌 보면 그날 잠롱시장의 강연 핵심은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 건강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자고 말한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말하자면 적게 먹고 적게 입고 적게 쓰는 생활을 실천해 남은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자, 근면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청렴결백하게 살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그 강연을 듣고 굉장히 큰 감동을 받는 모습을 보았다. 왜냐하면 잠롱시장이 그러한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구체적인 삶에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김대중씨가 지자제를 관철시키기 위해 단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이제 우리사회의 운동도 무조건 목소리만 높이는 시대는 지나갔구나, 사회운동의 지도자들도 생활속에서 솔선수범하고 근면성실하고 정직하고 언행이 일치된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더 이상 지도자가 될 수없겠구나’라고 사실을 절감했다.



미인계를 조심하시오


경실련을 시작할 즈음 대학 시절부터 잘 알고 지냈던 장명국소장(석탑노동연구소 소장)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잠시 들른 적이 있다.

내게 ‘요즘 어떤 일을 하고 있냐’고 묻길래 내가 ‘경실련에 대한 구상을 설명해주고 곧 발기인대회를 가질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랬더니 장소장이 하는 말이 ‘내게 테러를 조심하라’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그 당시 현대그룹에서 노조위원장을 식칼로 테러한 사건이 노동운동권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을 때였다.

내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장소장이 상당히 인상깊은 말을 했다.

‘경제정의를 위한 운동, 특히 부동산 투기근절을 위한 운동은 재벌의 꿀단지를 건드리는 운동이다. 재벌은 운동권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는다. 왜냐면 좌경, 용공, 폭력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감옥에 쳐넣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재벌이 언론을 좌지우지하고 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는 시민운동은 재벌들도 손을 쓸 수가 없다. 한마디로 명분에서 밀리기 때문에 재벌로서도 대응방법이 없으니 결국엔 정정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테러를 가할 거다’

장소장은 이렇게 말하며 ‘몸조심을 하라’는 당부를 했다. 장소장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노동운동권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알려진 노동운동가이다. 그런 그가 시민운동에 대해 이러한 예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나중에 내가 우연한 기회에 알고 지내던 한 안기부 직원에게 “‘누가 내게 테러를 조심하라’고 하더라”고 말했더니 그 안기부 직원의 말이 더 재미있었다. 그가 말하기를 나더러 ‘요즈음은 절대로 테러는 하지 않을거다. 대신 미인계 같은 것은 할지도 모르니까 서총장님이 여자를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다’라고 했다.

테러니 미인계니 하는 말이 모두 약간의 과장과 농담의 의미를 담은 말이지만, 어찌 되었건 노동운동가건 안기부직원이건 간에 경실련과 같은 운동이 얼마나 기득권 세력에게 큰 압력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모두 상당히 공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경실련은 짧은 시간안에 우리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단체로 성장했고, ‘경제정의’를 중요한 목표로 삼았던 만큼 재벌들에 대한 뼈아픈 비판을 어느 단체보다 많이 했다.

그리고 이런 경실련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것이 바로 경실련 정신과 실무자들의 헌신적인 활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경실련을 지탱해준 경실련 정신을 운동원칙의 측면에서 보면 크게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운동,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운동,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 의식개혁을 강조하는 운동, 공공선(公共善)을 추구하면서 정론을 피력하는 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운동의 원칙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켜오고 있다.

이러한 운동방식을 경실련 활동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실무자들이다. 때문에 실무자들이 경실련에 처음 들어오면 2박3일간 실무자 교육을 받는데, 이때 내가 2시간 정도 반드시 강의를 한다. 경실련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실무자가 가져야할 자세는 어떤 것이며, 경실련의 정신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을 강의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우선 첫째, 운동권에서 가졌던 모든 생각을 버려라는 당부를 한다. 운동권 시절에 쓰던 이념의 색안경을 벗어버리면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가 보일 것이고 결국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는 큰 운동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다. 물론 맨 처음 운동권이 되려고 마음 먹었을 때 가졌던 기본자세는 끝까지 버려서는 안된다는 당부의 말도 덧붙인다.

사실 이것은 딱히 실무자들에게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사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과거에 운동권이었고, 그래서 누구보다도 운동권적 잔재를 청산하고 평범한 시민의 문화로 돌아가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또 반면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늘 노력했다.

그 다음엔 ‘타협하지 말아라’라는 이야기를 한다. 말하자면 경실련은 어느 지역에서든지 ‘로비가 통하지 않는 맨 마지막 단체가 되어야 한다. 끝까지 정의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 그리고 누가 경실련에 제보를 하면 진실을 밝힐 때까지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만약 이런 태도를 잃어 버린다면 소금이 짠 맛을 잃어 버리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한다.

여기서 타협하지 말라는 말은 지나치게 진보적이라든가 급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경실련은 지나치게 진보적인 운동이 아니라 그냥 정직하고 정의를 지키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빈손 이야기’를 한다. 경실련을 찾아오는 어떤 사람도 그냥 빈손으로 돌려보내서는 안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에 대한 사랑이 말라버려 경실련을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되돌려 보낼 지경이 되면 오히려 본인 스스로 경실련을 떠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네번째로 경실련은 정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올바른 의견, 즉 정론(正論)을 펴는 단체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농민들의 편에 서기는 쉽다. 오히려 정말 어려운 것은, 노동자, 농민, 시민들을 비판해야 할 때이다. 따라서 때로는 나라를 위해서 정부와 협력할 줄도 알고, 불이익을 각오하고 정부나 재벌, 그리고 노동자, 농민, 시민을 비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섯번째로는 이 운동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이다. 따라서 증오에 기초해서는 안되며,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선한의지에 불을 당겨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우리의 운동방식 모두가 남을 속이지 않고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정직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여섯째, 경실련 회원들에게 경실련 운동은 좋은 친구를 사귀는 운동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경실련운동은 1~2년 하다가 흥미를 잃고 그만두는 그런 운동이 아니라 평생을 하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정이 생겨 한두해 열심히 하다가 몇해 동안 경실련 운동에 소극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든지 여유가 생기면 또 다시 열심히 할 수 있는 운동이 바로 경실련 운동이다. 따라서 경실련 운동은 좋은 친구를 사귀는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강조한다.

일곱째, 경실련 운동이 궁극적으로 정신혁명운동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때문에 우리가 경실련 운동을 한다는 것은 도의를 지키고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면서 끝까지 정의가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덟째, 실무자들 모두가 자신이 사무총장이라는 자세로 일하라는 당부를 한다. 사실 경실련의 규모가 커지면서부터는 경실련의 모든 사업은 담당 실무자들의 손에서 이뤄진다. 나는 실무자들의 의견을 듣고 큰 방향만 결정해줄 뿐이다. 따라서 모두가 사무총장이라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실무자들에게 꿈과 비전을 가져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를 돌이켜 봐도 경실련 운동을 시작할 때 어떤 모델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가지고 있던 철학과 아이디어를 모아서 개척한 것이 바로 경실련 운동이다.

따라서 누구나 꿈과 비전을 가지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큰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나의 경험을 들려 준다.

이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짠 맛을 잃지 말자’는 것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었을 때 더 이상 소금이 아니듯이 경실련도 이런 정신을 잃었을 때에는 더 이상 경실련이 아니기 때문이다.